매일신문

[야고부] 대자보(大字報)

수많은 선비들의 목숨을 앗아간 무오'갑자'기묘'을사사화(士禍)에 이어 발생한 정미사화는 벽서(壁書) 한 장으로 시작됐다. 1547년 9월 과천 양재역에서 발견된 벽서는 문정대비의 수렴청정과 이기 등의 농권을 비방하는 내용이었다. 벽서 작성자를 찾지 못하자, 윤원형 일파는 이를 빌미로 정적들을 제거할 음모를 꾸몄고 정미사화를 일으켰다.

벽서는 여러 사람에게 널리 알릴 목적으로 공공장소에 부착한 익명의 게시물로 괘서(掛書)라고도 한다. 양재역 벽서처럼 불만을 품은 개인 혹은 집단이 특정 인물 및 체제를 공격하거나 비난'저주하는 내용이 많았다. 부착 장소는 장터나 포구, 관아, 마을 입구의 장승 등 인적이 많아 주의를 쉽게 끌 수 있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오늘날의 벽신문, 대자보(大字報)의 원조인 것이다.

벽서 사건은 주로 조선시대에 발생했으나 신라 진성여왕 때도 실정을 비방한 벽서가 등장할 정도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집권층의 실정이 거듭되거나, 집권층 내부의 정쟁이 극심할 때, 언로(言路)가 막혀 하층민의 의견과 염원이 상층부로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경우 벽서 사건이 자주 발생했다. 이처럼 매스미디어가 없던 시대에 벽서 혹은 괘서는 유용한 정보 전달 수단이었다. 서양에서도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 당시 각종 벽신문이 등장해 민중들에게 소식을 전했다.

매스미디어 등장 이후에도 벽신문, 대자보는 매스미디어를 이용할 수 없는 민중들의 미디어였다. 특히 1970, 80년대 대학에 다닌 세대에게 대자보는 '친숙한 매체'이다. 강의실을 비롯한 건물 벽만이 아니라 창문, 계단 등 틈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나붙었다. 그러나 그 대자보는 '불온의 상징'이었다. 군사 정권의 폭압을 비판하고 저항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자보 작성자나 게시자는 교내 사찰 경찰과 숨바꼭질을 벌여야 했다.

대자보가 부활했다. 고려대, 서울대 등에서 대학생들이 우리 대학 교육을 비판하는 글을 게시한 데 이어, 광주에선 6'2지방선거 시장 예비후보를 비방하는 대자보가 등장했다. 첨단 디지털시대를 맞아 TV, 신문 등 전통 매스미디어의 위기가 거론되는 시대에 올드미디어 중에서도 올드미디어인 벽서, 대자보가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된 현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 미디어도 구관이 명관인가.

조영창 논설위원 cyc58@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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