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감정이 참 이상해진다. 어쩔 수가 없음을 뻔히 알지만 돌아가고 싶고, 그립고 씁쓸하다. 더러 아름답기도 하겠지만 지난 삶을 아무리 잘 보낸 사람이라 하더라도 대개는 이와 비슷할 터이다. 더욱더 허망한 것은 그동안 자랑스럽게 여겼던 학식이나 경험이 한갓 찌든 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때일 것이다.
영화 '제3의 사나이'의 원작자로 잘 알려진 그라함 그린의 짧은 소설 '귀향'은 시간의 끔찍한 파괴력을 잘 보여준다. 주인공인 나는 유년 시절 이후 30년 만에 찾은 고향에서 까맣게 잊었다고 생각한 여덟 살 때의 첫사랑 소녀를 기억해 낸다. 그때 나무 대문의 구멍 속에 서로 사연을 적은 메모지를 넣던 기억이 있어 찾아보니 아직도 한 장이 남아 있다. 가슴 떨림과 함께 펼쳐보니 그것은 자신의 이름 머리글자가 적힌 춘화(春畵)였다.
나는 철저한 배신감을 느낀다. 그러나 곧 나를 배신한 것은 어린 시절에 그린 조잡한 춘화가 아니라 지난 30년의 세월이었음을 깨닫는다. 당시 그 그림은 무언가 독특하고 아름다운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3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모든 순수성은 없어지고 나의 눈에는 오로지 음란한 춘화로만 보이는 것이다.
어제는 4'19혁명 50주년이었다. 전국 곳곳에서 그 뜻을 되새기는 행사가 열렸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때의 순수성이 자꾸만 흐려지는 것 같다. 아마 '정치꾼'들의 농간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올해도 어김없이 정치권은 논평을 냈다. 한나라당은 천안함 침몰 사건으로 겪고 있는 현재의 국가적 어려움을 4'19의 희생정신을 계승해 극복하자고 했다. 민주당은 4'19정신을 계승하려는 민주세력이 권위주의 체제로 역행하려는 현 정부와 힘든 싸움을 하고 있다며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했다.
이들을 보면 지난 시간이 지니는 파괴력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오로지 독재 정권 타도라는 순수성으로 시작한 혁명이 50년이라는 세월 동안 제멋대로 뒤틀리고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 이용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순수성은 사라진 지 오래고 이를 이용하는 세력만 남은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평소에는 까맣게 잊고 있다가 4월 19일만 되면 약속이나 한 듯 그 정신을 계승하자고 떠들어 대는 말들은 이제 그만 듣고 싶다.
정지화 논설위원 akfmcp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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