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신의 신작 장편소설 '은교'는 여러 가지 관점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로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지식이나 정보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교과서류'의 책이 오직 한 가지 방식으로 읽히고, 읽혀야 한다면 문학 작품은 읽는 이에 따라, 그날그날의 심정에 따라 다르게 읽힐 여지가 많을수록 훌륭하다고 할 수 있겠다.
문학 작품이 단 한 가지 주제로, 단 한 가지 방식으로 읽힌다면 좋은 작품이 아닐 것이다. 여러 가지 관점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박범신의 '은교'는 좋은 소설이다.
표면적으로 소설 '은교'는 나이 70을 눈앞에 둔 노 시인이, 17세 여고생을 사랑하고, 탐하는 이야기다.
'이적요'라는 노(老) 시인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철저하게 절제된 삶을 살아왔다. 그는 한평생 고귀한 일에 매달려 왔으며 고결한 글쓰기에 온 영혼을 바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생 곁눈질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런 만큼 사회적 명망은 높고 시인으로서 성취는 깊다.
그런 노 시인이 '어디로 튈지 모를 17세 소녀' '살아있는 육체'를 탐한다는 설정부터가 도발적이고 의미심장하다.
소설 '은교'는 노 시인의 분신 혹은 또 다른 자아라고 할 수 있는 젊은 시인 '서지우'를 등장시켜 젊음과 늙음, 태양 아래 깡그리 드러나 버리는 '젊은이의 미숙함'과 어둠에 가려져 있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을 '노인의 주름'에 대해 이야기한다. 더불어 일상과 시(낭만 혹은 이상)에 대해 집요하게 사색하는 소설이다. 그러니 '은교'는 참으로 여러 가지 각도로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소설은 위대한 시인이라고 칭송받던 이적요가 죽은 지 1년이 지난 뒤 유언 집행자인 Q변호사가 시인의 유언대로 시인이 남긴 노트를 읽으며 시작된다. 시인은 '내가 죽고 1년이 지난 후 이 노트를 공개하라'고 유언했다. 노트에서 시인은 자신의 제자이자 마지막까지 자신을 보필했으며 베스트셀러 작가로 이름을 떨쳤던 서지우를 자신이 살해했다고 밝힌다. 그를 살해했던 이유는 17세 소녀 은교를 사랑했기 때문이며 서지우와 자신은 연적이었다고 말한다. 노 시인은 자신의 은교에 대한 사랑은 지고지순했으나, 서지우의 은교에 대한 애정은 '짐승의 탐욕'에 다름 아니었으며 따라서 자신은 서지우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한다. 더불어 작가 서지우의 베스트셀러 작품은 모두 자신이 썼으며, 서지우는 다만 이름만 걸친 껍데기였다고 폭로한다.
시인은 정말 서지우를 살해했을까? 젊은 서지우 시인과 노 시인 이적요는 17세 소녀 은교를 두고 어떤 싸움을 했을까?
소설 '은교'는 표면적으로 노 시인이 17세 소녀를 사랑했고 그 질투심에 눈이 멀어 사랑하는 제자 서지우를 살해한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그 행간에 숨은 이야기는 시와 일상의 대결, 젊음과 늙음의 대결, 천재성과 아둔함의 대결, 투쟁의 세월과 낭만의 세월의 대결, 삶과 죽음의 대결이다. 그렇게 본다면 노 시인 이적요가 서지우를 향해 드러내는 질투는 젊음을 향한 늙음의 항변에 해당하고, 재능 없는 서지우를 향해 '멍청하다'고 쏟아내는 욕지거리는 결국 '멍청했던 자신의 젊음'을 향해 쏟아내는 욕지거리에 다름 아니다. 더불어 젊은 육체 '은교'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사랑은, 싱싱한 젊은 시절을 보냈음에도 그 가치를 알지 못하고 스스로 '명분' 혹은 '가치' 있다고 믿은 것들을 좇느라 소진해버린 자신의 젊은 시절에 대한 회한에 해당한다.
위대하게 사느라 젊음을 소진해 버린 이적요 시인은 '살아있는 17세 소녀' 은교를 보며 "너희는 살아 있었고 함께 있었다. 두 동생을 양팔로 싸안고 있는 너의 모습은 햇빛보다 환했다. 일상적 삶에 깃든 너의 참모습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네가 일깨워준 감각의 예민한 촉수들이야말로 내가 썼던 수많은 시편들보다 훨씬 더 신성에 가깝다는 것을 알았고 내가 세상이라고, 시대라고, 역사라고 불렀던 것들이(이적요 시인은 명분과 혁명의 깃발 아래 살았으며 그 탓에 감옥에 다녀오기도 했고 그것을 훈장처럼 여겼다.) 사실은 직관의 감옥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시들은 대부분 가짜였다"라고 고백한다. 고상한 시인으로, 지조 높은 선비로 살아온 이적요 시인이 '찬란한 삶' '살아있는 삶'을 깨닫는 순간이다. 지은이 박범신은 이 소설을 통해 '그 어떤 시보다 삶이 아름답고 싱싱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지은이 박범신은 후기에서 "은교를 통해 나는 존재의 내밀한 욕망과 그 근원을 탐험하고 기록했다"고 밝히고 있다. 육필 원고를 고집해온 박범신이 처음으로 워드프로세서로 작성한 소설이기도 하다. 박범신은 흔히 '영원한 청년 작가'로 불리는데 최근 3편의 장편 소설 '촐라체' '고산자'에 이어 이 소설 '은교'를 잇따라 출간해 그가 젊은 작가임을 다시 보여주었다. 흔히 어떤 작가가 오랜만에 책을 내면 '굉장히 숙고한' 혹은 '고심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 게 우리나라의 문학 현실이다. 하지만 오랜만에 책을 내는 대부분의 작가는 '더 이상 쓸 이야기가 없거나 게으르거나 딴 일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오랜만에 발표한 작품들은 형편없기 그지없다. 408쪽, 1만2천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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