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우리는 물질적인 생산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이 갖게 될 한계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다. 어느 신부님이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내게는 행운이 있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농사를 지으시는 분이신데 제가 집에 가면, 당신은 아무 말씀 없이 밭에 같이 일하러 가십니다. 때로 몸이 피곤해서 제가 좀 꾸물거리면, 어머니께서 '아버님 밭에 나가셨다'라고 하시지요. 하루종일 일하다 보면, 땅을 통하여 나를 다시 세우게 됩니다." 나는 아들에게 존경받는 이 아버님이 누구일까를 생각했었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그 아버님이 내가 천주교 교우촌을 조사하면서 만난 김성태 회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경북 상주시 사벌면 퇴강리에는 '퇴강 혹은 물미공소'라고 불리는 천주교 교우촌이 있다. 강변을 낀 길로 들어서면, 붉은 벽돌로 깔끔하게 지어진 성당이 자그마한 농촌 마을을 거느리듯 서 있다. 이곳은 김해 김씨 집성촌인데 1897년 세명이 마을 밖으로 나가 교리를 배워온 뒤로 천주교 마을이 되었다. 현재도 한 사람을 제외하고 전 주민이 천주교 신자이다. 그분들은 100여년을 물적, 영적으로 함께 생활하면서 사제 13명, 수도자 15명을 배출했다. 마치 마을 전체가 속세생활을 체험하는 수도원같다. 이 마을은 군복무 시절을 빼고는 마을을 떠난 적이 없는 역대 회장님들이 이끌고 있다. 김성태 회장은 이곳에서 6대' 8대 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내가 마을 조사 갔던 날 그분은 역대 회장 모두를 댁에 모셔서 그분들이 답하게 배려하셨다. 정작 당신이 대답하지는 않으셨다. 마을을 나오면서, 이곳에서 자란 사제나 수도자는 어떻게 자랐을까를 궁금해했었다.
"아버님의 가장 큰 장점은 말씀이 없으신 점입니다. 섣불리 말씀하시지 않고, 듣고만 계십니다. 복잡한 일로 가족들끼리 한창 논의하고 있을 때면 아버님은 슬그머니 사라지십니다. 강둑을 오가시면서 혼자 기도하고 계십니다. 묵묵히 기도하시는 아버님의 모습은 현명한 이가 몇시간 동안 열변한 것보다 더 큰 가르침으로 남습니다."
모처럼 집에 와서 아버지를 따라나섰지만, 아버지는 하루종일 함께 일을 해도 한마디도 하지 않으신단다. 침묵으로 가르치는 아버지, 평범한 농민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가난한 이의 처지로 내려가는 사제가 되라는 가르침으로 읽는 아들. 이것이 바로 그 마을에 흐르는 비밀이었다. 땅을 지키고, 전통을 지키고, 인간정신을 지켜내는 김성태 회장의 이러한 생활 모습은 이 말 많고 빠르게 변하는 사회가 그런대로 방향을 잃지 않게 지키게 하는 우리의 방향키이다. 사회 한쪽을 묵묵히 지키고 있는 다수의 얼굴이다.
김정숙 영남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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