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엄원태의 시와 함께] 마흔 번의 낮과 밤 / 권혁웅

불혹은 일종의 부록이거나

부록의 일종이다

몸 여기저기 긴 절취선이 나 있다 꼬리를 떼어낸 자국이다 아무도 따라 흔들리지 않았으므로 몸은 크게 벌린 입처럼 둥글다 제 자신을 다 집어넣을 때까지 점점 커질 것이다 저녁은 그렇게 온다

자다가 깨어날 때에는 꼭 뒤튼 자세다 작은 물길 하나가 여기저기 부딪혀 흘렀다 내 등본은 패이고 깎여나간 것 투성이다 삼각주에 관해서는 말할 것이 없으므로 침대는 먼데서 날아온 것들로 버석거린다

내 방은 우물이 아니어서 돌을 던져도 아무 소리가 안 난다 새벽은 절취선처럼 온다 일렁이는 빛이 다 물살이다 그걸 마저 뜯어내거나 바닥에 닿으려면 몇 십 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불혹을 맞이한 시인의 미묘한 심정이 수묵담채처럼 여백 많은 문체로 그려진다. 시인은 '감각파'답게 수일한 이미저리를 환기시키는 문장들로 '불혹'에 이른 인생의 소회 내지는 위기의식을 감각적으로 드러낸다. 젊음은 그렇게 가버리고 이젠 똥배만 불룩해질 '부록'의 여생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민감한 시인에게는 "꼬리를 떼어내"고 "크게 벌린 입처럼 둥글"어진 몸으로 "제 자신을 다 집어넣을 때까지 점점 커지는"(여기저기 절취선이 생긴 자의식 덩어리로만 남는) 인생의 저녁처럼 느껴졌던 것.

시인이라면 온갖 감각과 정신의 '유혹'에 민감해야 하거늘, '불혹'이라니! 시인에게 불혹은 그렇게 "뒤튼 자세"이며, "패이고 깎여나간 것 투성이"여서, "돌을 던져도 아무 소리가 안 나"는 당혹으로 다가왔던가 보다. 시인은 그 느낌을 특유의 '감각의 긴장'으로 그려내고 있다. 세월은, "마흔 번의 낮과 밤"은, 시에겐 적(敵)이기도 하다는 사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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