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난 1945년 8월 15일 철도의 영업선은 6천406km로 국철이 5천038km(79%), 사철이 1천368km(21%)였다. 한국 철도는 일제의 대륙 침략과 식민지 정책에 의거, 건설돼 한반도의 교통을 새롭게 재편했다.
(그림 1)은 한국 철도의 형성 과정이다.
제1기(1899~1906년)에는 일본이 한국에서 러시아를 물리치고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한반도를 동남에서 서북으로 종관하는 경부선 (그림 1의 ①)과 경의선 (그림 1의 ②)을 부설했다. 이때 일본은 경부선과 경의선을 한국 지배와 대륙 침략을 위한 간선 철도로 만들기 위해 노선과 궤간의 선정에까지도 적극적이었다.
두 철도는 한국의 정치적 중심도시와 경제적 선진지역을 관통하고 가장 빠른 시일 안에 최대한의 병력과 물자를 만주에 집결시킬 수 있는 노선이었다. 일제는 일본~한국~만주의 최단거리 코스를 선택한 것. 또한 경부선과 경의선을 통해 한국과 일본의 무역을 촉진하고 한국에서의 독점적 지배를 확보하려는 일본 자본가와 일본군 수뇌부의 욕구를 아울러 반영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일본의 경부선·경의선의 부설과 운영은 한국인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와 아픔을 주었다. 일본은 경부선과 경의선을 부설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철도 자력건설운동을 압살하고 6천600여만㎡(2천여만평)의 토지와 연인원 1억명 이상의 노동력을 수탈했다. 이는 한국인의 격렬한 항일투쟁과 철도반대운동을 불러왔다. 한국인이 철도를 근대 문명의 이기로서 받아들이기보다는 국권과 국토, 생명과 재산을 빼앗는 근대 문명의 흉기로 인식하게 된 배경에는 이러한 특수 경험이 깔려 있었다.
제2기(1906~1917년)에는 일본이 한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한국통감부 철도관리국(1910년 10월부터는 조선총독부 철도국)을 설치해 철도 경영의 통일을 기하는 한편 한반도의 곡창지대를 서남에서 동북으로 종관하는 새로운 간선 철도를 부설했다. 바로 호남선(그림 1의 ③)과 경원선(그림 1의 ④)이다. 그리고 만주에서 확보한 기득권을 공고히 하기 위한 방편으로 한국철도와 만주철도를 연결하고 경부선과 경의선의 수송력을 강화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전자는 경의선의 개량과 압록강 철교의 가설 및 안봉선(그림 1의 ⓐ)의 표준궤로 개축 등이었고 후자는 한국과 만주 국경의 통과 화물에 대한 특별할인운임제도와 관세감면조치의 마련 등이었다. 이에 따라 1910년대 중반까지 한국에서는 동·서·남해의 주요 항구를 기점으로 한반도를 Ⅹ자형으로 종단하는 철도망과 교통 운수체계가 기본적으로 형성됐다.
제3기(1917~1925년)에 일본은 한국과 만주의 일원적 지배를 촉진한다는 의미에서 한국철도를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 위탁해 경영했다. 위탁 경영의 내용은 남만주철도가 한국철도의 건설·개량·보존·운수 등의 일상 업무를 수행하는 대신 조선총독부가 철도의 계획·경영·투자·수익 등에서 실권을 행사하도록 짰다.
한국철도와 만 철도의 통일 경영은 러일전쟁 이래 추진돼 온 경부선·경의선의 중시 정책이 확대·강화된 것으로 대륙에 본격적으로 세력을 뻗치려는 일본 군부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었다.
하지만 한국철도와 만주철도의 일체화는 양측 모두에게 불이익을 가져 왔다.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게는 불필요한 자금의 지출이 늘어났고 조선총독부에는 철도 건설의 부진을 안겼다. 이 시기엔 한반도의 동북 지방을 종단, 만주에 접속하는 간선철도로 함경선 (그림 1의 ⑤)이 부분 개통되고, 일본인 자본에 의해 사철이 많이 건설되었을 뿐이었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는 조선총독부가 다시 철도를 직접 경영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졌다. 때마침 1919년에 발생한 한국인의 반일민족해방운동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 정책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일본은 한국의 산업 개발을 촉진한다는 명분 아래 1925년 4월부터 철도 경영을 다시 조선총독부로 환원해 버렸다.
제4기(1925~1937년)는 일본이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수탈을 강화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철도망을 확장한 시기다. 이 시기에 부설된 주요 철도들은 대체로 일본의 인구를 배출하고 식량과 연료의 부족을 보충하며 수출을 증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철도 노선은 곡물 생산과 삼림·지하자원이 풍부한 지역을 관통하도록 구상됐다. 대표 철도는 도문선 (그림 1의 ⑥)·전라선(그림 1의 ⑦)·혜산선(그림 1의 ⑧)·만포선 (그림 1의 ⑨) 등으로 모두 국철로 신설됐거나 사철을 매수해 확장· 개축했다. 1932년 만주국이 들어서자 한몫을 챙기려는 일본인 자본이 한국에 앞다퉈 사철을 부설했다. 이 시기 한국 철도의 영업선은 연평균 202㎞나 증가했다.
제5기(1937~1945년)의 철도 부설은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군대와 군수 물자를 수송하기 위한 군사적 성격이 강했다. 이 때문에 일본과 민주를 잇는 최단거리 코스로서의 한반도 종관 철도가 다시 중시됐다. 경부선을 보조하면서도 함포의 사정권을 피할 수 있는 경경선 (그림 1의 ⑪, 오늘날의 중앙선)이 부설되고, 기존의 남북종관선인 경부선·경의선·경원선·함경선 등이 복선화됐다. 철도망이 연평균 157㎞씩 확대될 만큼 성황을 이뤘다. 이 시기 일본과 만주를 잇는 최단거리의 간선철도로 바로 도문선과 길회선 (그림 1의 ⓒ)이 새롭게 각광받았다. 이 철도들은 원래 1900년대 초부터 중국과 일본이 부설을 추진했지만 두 철도가 모두 개통돼 동일선상에서 접속하게 된 것은 일본이 만주국을 수립한 직후였다.
일본은 이들 철도의 기능 확대를 위해 1933년부터 도문선과 함경선의 일부 및 그들의 종단항 (청진·웅기·라진)을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 위탁해 통일 경영토록 했다. 그리하여 1930년대 중반부터 소위 '북선 루트'(그림 1의 ⓒ·⑤·⑥)가 만주산 대두와 자원을 일본으로 반출하는 대신 일본군과 군수물자를 동북 만주로 반입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게 됐다. 이는 곧 '북선 루트'가 종래의 '봉천~부산 루트'(그림 1의 ⓐ·②·①) 및 '봉천~대련 루트'(그림 1의 ⓑ)와 더불어 일본~한국~만주를 연결하는 3대 간선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했다는 의미다.
이처럼 한국의 간선철도는 한국내의 사회·경제적 요구를 반영해 건설된 측면도 있었지만 주로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대륙 침략 정책을 실현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부설됐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간선 철도는 일본~한국~만주를 시간·공간적으로 최대한 단거리·단시간 안에 실현키 위해 남북 종관의 방향을 채택한 것이다.
또한 노선은 항구를 기점으로 한국의 정치적 중심도시와 곡창지대 및 자원이 풍부한 지역을 관통토록 했다. 실제 남북종단형과 항만기점형의 간선철도(그림 1의 ①~⑪)가 전국철의 80%를 차지했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철도의 식민지적 기형성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지표라고 할 수 있다.
정재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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