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오후 대구 중구 동성로 대구백화점 인근 샛골목에 자리 잡은 한 슈퍼. 가게 구조가 특이하다. 두 건물 벽 사이에 있으면서 한쪽 벽면에만 진열장을 짜 맞추고 셔터 문을 달아놓았다. 마치 얇게 썰어 놓은 치즈를 연상시키는 가게다. 정식 이름은 '은하 슈퍼'다. 높이는 2.5m로 여느 가게와 비슷하지만 앞뒤 폭은 50㎝에 불과하다.
작다고 얕잡아 보면 오산이다. '참치캔, 과자, 담배, 콜라, 우산, 부탄가스…' 웬만한 슈퍼에 있을 것은 다 있다. 음료수 키핑(keeping·보관)도 가능하다. 냉장고가 없는 옷가게 등 동성로 상가에서 일하는 손님들을 위해 기꺼이 냉장고를 내주고 있다.
유동 인구도 대로변 못지않다. 슈퍼가 자리 잡은 폭 1.5m의 좁은 골목엔 총총걸음으로 오가는 연인들이 많다. 동성로를 누비는 배달족들도 수없이 이곳을 지나다닌다. 수십여년 한자리를 지켜온 이 가게는 이젠 동성로의 명물이 됐다.
36년째 이곳을 지키고 있는 슈퍼지기는 김복(73)씨다. 경북 봉화에서 4형제 중 둘째로 태어나 1974년(당시 37세) 가게를 열었다. "원래 이 건물은 목욕탕이었어요. 목욕탕 일을 봐주며 부업으로 시작한 슈퍼 일이 천직이 돼 버렸죠."
동성로에서 반평생을 머문 김씨는 동성로의 역사를 줄줄이 꿰고 있어 동성로 터줏대감으로 통한다. 이 때문에 물건을 사려는 손님들보다 정보를 얻으려는 손님들이 더 많다.
은하슈퍼가 동성로의 명물이 된 데는 김씨의 남다른 소신도 한몫했다. 바로 '긍정'의 힘이다. 지나간 일을 교훈 삼되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번 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잖아요. 아쉬워할수록 내일을 시작할 힘만 줄어든다고 생각해요."
김씨는 30대 후반에 병으로 아내를 잃었다. "아이들을 생각해 더욱 마음을 다잡았어요." 그는 술 한잔 입에 대지 않고 오직 슈퍼일에만 매달렸다. 설과 추석 명절 하루씩만 빼고는 단 한번도 슈퍼 문을 닫지 않았다.
아이들에게도 늘 정직하고 무엇에든지 열심히 하라고 가르쳤다. "요즘 젊은이들은 인내력이 많이 부족해요. 월급이 적다고, 일이 힘들다고, 여러 직업을 전전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아쉬울 따름이에요."
지금도 아들 내외와 주위에서는 쉬면서 여생을 즐기라고 꾸준히 권한다. 그러나 김씨는 이 골목, 이 슈퍼를 떠날 수 없다. 슈퍼가 현재의 행복한 삶을 있게 해준 일등공신이기 때문이다.
김씨는 "매일 오후 10시쯤 슈퍼 문을 닫고 퇴근할 즈음 '과자랑 음료수가 먹고 싶다'는 손자 전화가 걸려온다"며 "요즘은 손자 전화받는 게 가장 큰 즐거움"이라고 웃었다.
임상준기자 new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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