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류동학의 동양학 이야기] 주(周)의 문왕과 무왕을 도와 주를 건국한 개국공신 강태공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강태공' 하면 낚시꾼의 대명사로만 알고 있지, 그가 중국사에서 가장 위대한 지용(智勇)을 겸비한 책략가였으며, 주의 문왕과 무왕을 도와 주(周·기원전 1,122~기원전 256)를 건국한 개국공신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는 은주역성혁명(殷周易姓革命)의 중심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성은 강(姜), 이름은 상(尙)이다. 여상(呂尙)이라고도 하는데, 여상은 가세가 기울어 데릴사위로 갔다가 구박을 받고 쫓겨나 백정이 됐다. 이후 자기를 알아주는 제후를 만나지 못하고 몇 십년 동안 방랑생활로 세월을 보내다가 팔순 가까이 돼서 주나라 도성 근방 자천담(玆泉潭)의 큰바위에서 낚시를 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사냥을 좋아했던 서백 창은 강태공이 조부인 고공단보(古公亶父)가 그렇게 찾았던 성인임을 알고, 태공(고공단보)이 바라던 성인이라는 의미의 '태공망'(太公望)이라고 불렀다. 여상의 본래 성이 강씨이고 서백 창이 그를 태공이라고 불렀기에 그 후부터 여상은 '강태공'이라는 이름으로 천하에 명성을 떨치게 된다.

주나라 왕의 보좌관이자 전쟁시 군사를 통솔하는 태사(太師)직을 맡은 강태공은 서백 창과 그의 아들 무왕 발을 보필했다. 서백 창은 사후에 덕성이 뛰어나다는 뜻으로 '문왕'(文王)이라 칭했다. 시호를 정하는 '시법'(諡法) 제도는 문왕 시대부터 시작된 것이다. 무왕은 지략가인 강태공의 보필로 주지육림(酒池肉林)과 포락지형(포烙之刑)의 형벌로 유명한 은 주왕(紂王)의 70만 대군을 '목야의 전투'에서 격퇴하여 주 왕조를 열었다.

강태공은 무왕에게 치국의 도리를 가르쳤는데, 이것이 모든 분야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무왕은 겨우 재위 6년 만에 승하해 무왕의 장자 송(誦)이 주공, 강태공, 소공 등의 옹립으로 겨우 열세살의 나이로 즉위해 왕위를 계승했다. 이 사람이 성왕으로, 서주(西周·기원전 1,122~기원전 770) 역사상 황금시대인 성강지치(成康之治)를 연 인물이다. 성왕이 어려 무왕의 동생 주공(周公)이 7년 동안 섭정을 하면서 낙양을 건설하고, 넓은 땅에 71개의 제후국을 봉하고, 친척들에게 53개를 분봉한 봉건제도를 시행했다. 그 가운데 주공의 장자인 백금(伯禽)은 지금의 산동성 곡부 일대를 분봉받아 노나라를 세웠는데, 곡부는 바로 공자의 고향이다.

강태공은 고향땅인 산동성의 치박시 동쪽땅을 분봉받아 제(齊)나라를 세웠다. 제는 춘추시대 환공(?~기원전 643) 때에 관중(?~기원전 645)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등장하여 부강한 나라로 발전한다. 제는 이후 전국시대(기원전 403~기원전 221)에 전염이 왕위를 찬탈하여 제 위왕(威王)이 되어 발전하다가 기원전 221년에 진(秦)에게 멸망한다. 한편 노나라는 예의와 학문을 숭상하는 나라로 발전하여 공자라는 걸출한 대교육자를 탄생시킨다.

나중에 당나라 숙종이 영을 내려 도성과 각주에 태공묘(太公廟)를 세우게 했는데, 이로부터 강태공은 전국적인 신이 되었다. 숙종은 강태공을 무성왕(武成王)으로 봉하고, 그 사당을 문선왕 공자의 문묘와 대칭으로 무묘(武廟)라고 불렀다. 이후 명(1368~1644)때 '봉신연의'(封神演義)는 강태공을 무궁한 법력으로 요귀를 물리치는 신으로 격상시켰다. 중국에는 설날에 집집마다 강태공의 형상을 그린 그림인 연화(年畵)를 붙였는데, 그 이유는 그해 귀신들이 범접을 못하고 복이 찾아든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숱한 세월을 낚으며 늙은이가 되었지만, 결코 하늘을 원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았고 그 인내의 결실이었던 단 한번의 기회로 천하를 얻을 수 있었던 강태공은 조급하고 쉽게 포기하는 현대인들에게 귀감이 되는 인물이다.

(다음카페-혜명동양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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