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에세이 산책] 발색하는 여자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 중에 한 번 만나고도 오래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몇 번 만나도 기억을 되짚어야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평생 기억에 남는 사람은 대체로 첫 대면에서 특징을 보인다. 재치 있는 말을 하거나 특이한 행동에 독특한 옷차림을 한 사람일 확률이 높다.

언젠가 나는 참 미묘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였다. 염색공예가와 화가 그리고 소리꾼을 포함한 문학인까지 있었다. 서로 처음 보는 자리였기에 자기소개의 시간을 가졌다. 그때 가장 먼저 손을 드는 사람이 있었는데 예쁘장한 여자였다.

황토색 생활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그녀는 오십대 중반쯤 되어 보였다. 예쁜 두건에서 실로 핀 들꽃이 바람에 나풀거리는 듯했고 납작한 신발에는 털이 보송보송 붙어 있었다. 동글동글한 얼굴과 오목조목한 이목구비에서 다소곳한 여성스러움이 솔솔 묻어났다. 그녀가 일어서더니 두 손을 모으고 예쁘게 절을 했다. 어쩌면 저렇게 고울까 생각하며 그녀의 입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데 깜짝 놀랄 말이 내 귀에 들려왔다.

"저는 발색하는 여자에요."

까만 눈을 내려깔며 말했다. 참말로 참해 보이는 여인의 입에서 그런 야한 말이 나오다니, 요즘 애들이 하는 말로 '헐'이라고 할 뻔했다. 그런데 그녀의 직업이 염색공예가라는 말은 내 무릎을 탁 치게 했다. 그녀는 빛깔을 내는 사람이 분명했다.

그 다음으로 옆에 있던 남자가 이어졌는데 그는 '시옷' 발음을 특히 강하게 했다.

"아하, 그래요? 저는 색을 쓰는 남자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린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는 화가라고 한다. 도대체 저런 기발한 생각이 어디서 나오는가 싶은 찰나, 그 옆에 있는 소리꾼이 바통을 받았다.

"음, 저는 색을 부르는 남자입니다. 오늘 우리가 경험한 모든 것은 색즉시공입니다."

말을 마친 남자는 야사에나 나옴 직한 '사랑가' 한 토막을 멋들어지게 불렀다. 정작 언어예술을 하고 있는 나는 이름 석 자만 말하는 멋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한 번 보고 끝난 인연이었지만 그녀의 색깔 있고 지혜로운 소개 때문에 오랫동안 내 기억 속에 선명하다.

주인석(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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