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장미가 만발한 주택가 골목길의 담장 너머로 왠지 낯익은 나무가 있어서 자세히 살펴보니 감나무다. 공해에 찌들고 햇빛을 제대로 못 봐 감나무 잎 특유의 짙푸른 색깔을 잃고 쪼그라든 모습으로 서 있지만 먼지를 뒤집어쓴 잎 사이로 다문다문 감꽃을 맺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 감나무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은 마당 앞뒤 쪽에 두어 그루씩 심겨져 있던 감나무에 대한 기억들이 얼마씩은 남아 있을 거다. 그때는 모르고 지나갔지만 지금 곰곰이 생각해 보니 동화 속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우리들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주었던 나무였다. 요즘의 4, 5월은 꽃들이 만발하고 온 천지가 신록의 푸르름으로 가득한 풍요의 계절이지만 예전은 그렇지 못했다. 6월 초나 되어야 겨우 햇감자를 비롯한 초여름 수확물을 구경할 수 있기 때문에 4, 5월은 애 어른 할 것 없이 먹을거리에 목을 매는 계절이었다. 오죽했으면 눈물의 보릿고개라 했을까? 그 와중에 5월 중순쯤에는 동네 이곳저곳에 심겨져 있는 감나무에서 풍성한 감꽃이 떨어져 애들을 즐겁게 했다. 감꽃은 씹으면 아삭아삭하는 소리와 함께 쌉싸래한 맛이 나는데 먹을 것이 없는 그 시절에 좋은 간식거리가 되었다. 빗자루로 깨끗이 쓸어 놓은 감나무 밑에 밤새 수북이 떨어져 있는 토실토실한 감꽃을 발견하는 기쁨…, 세상의 그 어떤 행복과 견줄 수 있으랴! 소죽 바가지 한가득 주운 감꽃을 실컷 먹고 남은 것들은 튼튼한 실에 꿰어 목걸이로 만들어 목에 걸고 다니면서 하나씩 하나씩 빼먹는 그 기분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다.
감꽃이 지고 더운 여름이 되면 감나무는 두껍고 넓은 잎으로 풍성한 그늘을 만들어준다. 한여름 더위에 들일을 하고 돌아온 농부들에게 그 시원한 그늘은 지친 심신을 회복시켜주는 달콤한 오수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추석이 지나고 산과 들이 누렇게 변해갈 즘에 감나무는 아직은 덜 익었지만 삭혀서는 먹을 수 있을 정도의 감을 우리들의 가을소풍이나 운동회의 먹을거리로 내어줘서 우리들 소풍 보따리의 구색을 맞추게 했다. 무서리가 내리고 들판이 텅 비어가면 감나무는 온몸의 잎들을 떨어뜨리고 소담스럽게 잘 익은 감을 우리들의 필요에 맞추어 여러 모양으로 내어준다. 곶감으로, 홍시로, 감 말랭이로…. 또 몇 개는 남겨뒀다가 겨우내 산새와 들새들의 먹이로 내어 주고 마지막으로 감잎은 소들의 여물거리로 내어준다.
봄에는 감꽃으로 허기진 우리들을 위로했고, 여름에는 그 넉넉한 그늘로 온 가족을 쉬게 하고, 가을이면 풍성한 과실을 아낌없이 우리에게 주었던 그 고마운 감나무를 이 각박한 도시의 한가운데서 만나니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고향 동무를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것처럼 안쓰러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화려한 봄꽃들과 잘생긴 나무들 사이에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는 그 감나무는 분주한 도시생활 속에 잊고 살지만 정말 기억하고 고마워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를 한 번쯤 기억나게 한다.
최동욱 (주)대경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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