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가 그린 '감자 먹는 사람들'을 보고 있다. 그림 속 사람들의 수와 생김새 그리고 주변 환경이 내 고향집과는 다소 다르지만 분위기는 사뭇 닮아 있다. 어느 하층민의 생활공간인 농가의 방안인 듯한데 초라하고 음울하나 떠도는 공기만은 따뜻하게 데워져 있는 것 같다.
그림 속 식탁 위의 감자는 친밀감을 느끼게 한다. 하루 일을 마친 농부들의 저녁식사 광경이 멍석에 앉아 밥 대신 감자를 삶아먹고 물을 마시던 우리 어린 시절의 그날과 너무 흡사하다. 서양과 동양의 차이에서 오는 갓이 달린 랜턴과 호롱불, 그리고 유리를 낀 창문과 문종이를 바른 봉창이 다를 뿐 그놈이 다 그놈이다.
#바깥 마당 갈아엎어 밭으로 만들어
고향집이라고 말하는 초가삼간이 내가 몇 살 적에 우리 집이 되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자 부랴부랴 재산을 정리하여 정착한 곳이 바로 어릴 적 우리 집이다. 서른 초반에 과부가 된 어머니의 첫째 화두는 '굶지 않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이백 평이 넘는 새집의 바깥마당을 갈아엎어 밭으로 만드셨다. 타작 공간보다 생산 공간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새끼를 기르는 어미새는 숲에서 먹이를 물어오기만 하면 되지만 인간 세상에는 터전이 없으면 곡식이나 열매를 거둬들일 수 없다.
논에는 벼와 보리를 심었다. 새로 일군 밭에는 감자를 심었다. 나락은 아이들 학비였고 보리와 감자는 주식에 가까웠다. 어머니는 당시 흔했던 밀레의 그림 '만종'을 보고는 대번에 "너희들은 좋겠다"며 부러워하셨다. 하루 일을 마치고 교회당에서 울리는 저녁 종소리를 들으면서 추수한 볏가리 옆에서 부부가 나란히 서서 기도드리는 모습을 보곤 샘이 나는 표정을 지을 때도 있었다. 부부는 사랑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나누면 힘겨움이 절반으로 줄어든다는 것을 과부가 되고 나서 비로소 알게 된 것이리라.
어머니는 여섯 살짜리 나를 아버지의 빈자리로 자꾸 밀어넣으셨다. 감자밭을 일구시곤 감나무 밑의 한 뙈기를 아예 나에게 떼 주셨다. "니가 밭 갈고 씨 뿌리고 거둬라." 또래 친구들을 불러 한나절 내내 밭을 일군 뒤 몸살로 몸져누워 며칠을 학교에 가지 못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여름 끝자락에 흰 감자, 자주색 감자를 무더기로 추수하여 가마니에 퍼담던 즐거움은 아름다웠던 기억의 잔상으로 선명하게 남아 있다.
#굵은 멸치 넣은 감자조림 지금도 즐겨
햇빛에 드러난 감자알의 푸른 부분은 혀가 아릴 정도로 따갑지만 부엌 아궁이에서 구워먹는 숯검댕이 감자 맛은 어찌나 황홀한지 지금도 그걸 생각하면 고향으로 달려가고 싶다. 모심기 할 때나 논매기 철에 자주 먹었던 굵은 멸치를 넣은 감자조림 맛은 '어릴 적 버릇 여든'이 아니라 하더라도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처럼 여태껏 나를 따라다닌다.
어머니는 감자를 쌀과 보리 다음 가는 양식으로 생각하셨다. 반 고흐가 자신의 초기 걸작인 감자 그림을 "내 모든 작품 중에서 가장 훌륭한 그림"이라고 치켜세웠듯이 어머니도 이에 못지않게 평생 동안 감자를 끼고 돌며 사랑을 쏟으셨다. 고향인 농촌을 떠나 아들의 직장이 있는 도시로 떠나 와서도 오매불망 감자 농사 지을 궁리를 접지 않으셨다.
#인부들 삽질에 '어머니 감자밭' 사라지고
그러다가 옥상에 흙을 올려 만든 화단의 꽃을 밀어내고 감자밭으로 만드신 걸 보면 지난날의 누추했던 상처를 감추기보다는 오히려 드러냄으로써 보상받으려는 그런 심리가 다분히 작용한 것 같다. 어머니가 가신 지도 벌써 십여 년이 지났다. 지난 겨울의 강추위로 옥상 방수바닥이 터지는 바람에 어머니의 꿈이 서려 있는 감자밭의 흙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인부들의 삽질에 오래 묵은 추억까지 실려나가고 이젠 텅 비어 있다. 나도 무소유의 주인이다.
구활<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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