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 시외버스터미널 부근에 위치한 세명병원의 담벼락과 맞붙은 빨간색 포장마차. 양옥자(60·여·경산)씨가 18년째 애지중지 운영하고 있는 일터다. 여기서 나오는 벌이로 자녀들을 모두 출가시키고 이제는 소일거리 삼아 하는 일이지만 이웃들의 가교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동네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포장마차에서 어묵·도넛 등 먹을거리를 만들어 팔아 작은 집까지 마련했다"는 그는 이제는 일을 접어도 되지만 건강이 허락될 때까지 이 작은 정든 공간을 지킬 것이라고 다짐한다. 최근까지 아동복지시설에 도넛이나 빵을 구워 보내기도 했지만 이젠 손이 붓고 관절이 아파서 그일도 못한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런 양씨가 "내삶에 충실하며 열심히 살다 보니 억울한 것은 세월이 풀어주더라"며 굴곡지게 살아온 자신의 인생사를 풀어놓았다.
양씨가 신혼살림을 시작한 곳은 경북 울진의 한 마을. 서른여덟 되던 해에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을 맞았다. 어린 1남 3녀를 키울 막막함보다도 "남편을 잡아먹었다"는 시댁 식구들의 핀잔이 더 양씨의 가슴을 에고 절망하게 만들었다. 이웃사람들 모두가 손가락질을 하는 것 같아 몇 번이고 바다에 뛰어들고 싶었지만 아이들이 눈에 밟혀 마음을 고쳐 먹었다.
아이들을 잘 키워야 먼저 간 남편에게 도리를 다한다는 생각에 식당에서 일을 하며 월 17만원으로 1남 3녀 등 다섯 식구가 살아야만 했다. 군민회관에 딸린 단칸방을 얻어 살았는데 1년쯤 지나니 그마저도 비워달라고 했다. 할 수 없이 친구를 보증세워 300만원을 융자받아 집을 옮겼다. 이때 그곳에서 포장마차를 시작한 것이다.
2년 후 남편이 남긴 빚에다 융자금까지 갚을 수 있었다. 하루에 3, 4시간 자고도 고단한 줄 모르고 살았단다. 1991년 여고를 졸업한 큰딸이 대구에 직장을 얻으면서 온식구가 대구로 이사했다.
양씨는 다시 경산시장 부근에서 포장마차를 차렸다. 하지만 포장마차는 관청 단속반에 의해 없어지기가 부지기수였고 술을 팔다 보니 남자들의 짓궂은 장난도 견뎌내기 힘들었다. 깡패들에게 얻어맞기도 일쑤였다. 그래서 옮겨온 곳이 지금의 터.
"건축물대장이 있는 식당은 아니지만 그래도 비를 피해 가며 일을 할 수 있는 공간에다 따뜻한 주민들이 있어 늘 행복하다"면서 "먹을거리가 아닌 행복을 전해주고 파는 온정의 가게로 나기를 바랄 뿐입니다." 양씨는 오늘도 어김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글·사진 장양숙 시민기자 fn3496@hanmail.net
멘토 황재성기자 jsgold@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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