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들은 이태리어 수업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왔다. 유학을 염두에 둔 성악과·의류학과 학생들, 그들과 옷깃이라도 스치고픈 남학생들, 그리고 오페라를 좋아하는 그 나머지들. 그 수업의 기말고사에는 '라 돈나 에 모빌레'(La Donna e Mobile)라는 아리아를 외워 쓰는 문제가 나왔다. 오페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한 번은 들어봤음직한 '여자의 마음'.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이 한없이 변하는 여자의 마음···' 이렇게 시작되는,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에 나오는 유명한 아리아이다.
초등학교 음악책에 실린 이 노래를 부르다 '무슨 그런 노래를 부르느냐'는 엄마의 핀잔을 들은 적이 있다. 어린 마음에도 가사가 마뜩잖았지만 경쾌한 선율에 이끌려 불렀던 것인데 시조부 앞에서조차 '계집 녀'가 아니라 '여자 녀'를 끝내 고집하셨던 엄마에게는 몹시 듣기 거북한 내용이었던 것이다. 노래만 들어서는 남자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몰라주는 변덕스런 여자를 향한 안타까움과 원망이 담긴,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류의 탄식과 애원인 듯한데 경쾌하고 발랄한 선율이 익살맞고 장난스런 투정처럼 웃어넘기게 한다. 그 기괴한 익살스러움의 정체를 알게 된 건 오페라 '리골레토' 속에서 이 아리아를 들은 이후였다.
리골레토는 만투아 공작의 꼽추 어릿광대이다. 공작은 난봉꾼, 호색한이고 리골레토는 그 일에 충실한 조력자이지만 자신의 딸 질다가 혹여 그런 몹쓸 꼴을 당할까 전전긍긍이다. 하지만 신분을 숨긴 공작은 이미 질다를 만나 그녀의 사랑을 얻었고 뒤늦게 이를 알게 된 리골레토는 청부업자에게 공작 살해를 요청한다. 공작을 유인하기 위한 방편으로 청부업자의 요염한 여동생이 등장하고 공작은 그녀를 꼬드기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그때 바로 이 아리아가 나온다. 리골레토는 질다의 마음을 단념시키기 위해 공작의 실체를 알리려 그곳에 질다를 데려간다. 숨어서 자신에게 한 공작의 모든 말과 행동이 거짓이었음을 고통스럽게 확인하고도 질다는 공작을 살리기 위해 죽음을 택한다. 딸을 구하고 그 복수를 하려던 리골레토는 죽어 가는 딸을 부둥켜안고 저주하며 울부짖는다.
변덕스런 게 여자의 마음이라 알 수 없다는 공작을 목숨 걸고 사랑하는 질다가 숨어 가슴 치며 듣는 아리아가 바로 그 '여자의 마음'인 것이다. 예전보다 덜 하다고는 하나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여자가' '여자는'으로 시작하는 말들이 많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하지만 남자의 적이 여자인 적이 있었던가. 그렇다면 남자의 적 또한 남자임이 분명한데 아무도 그런 얘길 하지 않는다. 이는 '자, 봐라. 여자가 아니라 남자의 마음이 갈대'라고 반박하는 것과 같다. 그런 치졸과 우매로 허비하기엔 우리의 진짜 적들이 너무 많다.
변호사 김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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