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이하게 발달한 억산 남부를 살폈으니 이제 억산 본채로 돌아가 운문분맥 흐름을 다시 짚을 차례다.
호거산을 거친 다음 운문분맥은 '억산재'로 낮아졌다가 '억산'(億山)으로 다시 솟은 후 더 낮은 '인재'로 떨어져 내린다. 그런 뒤 '구만산'(九萬山) 덩어리로 높아져 잠시 해발 700m대를 회복하기도 하나 차후엔 줄곧 그 이하 높이를 오르내린다.
이 여정에서 동편 억산재(765m)와 서편 인재(555m) 사이 3㎞ 정도의 산덩이가 하나의 별개로 구분된다. 그 동쪽에 호거산 덩어리가 있고 서편에 '구만산 덩어리'가 있으며 중간에 '억산 덩어리'가 있는 것이다.
이 산덩이에 붙은 '억산'이라는 이름은 다른 데서는 듣기 힘든 매우 특이한 것이다. 그 '억'을 부자의 상징으로 여겨 새해 첫날 그 정상에 올라 한해 사업번성을 축원하는 단체가 있는 것도 그래서 빚어지는 일일 터이다.
밀양 산내면 향토지는 그 이름이 '億萬乾坤'(억만건곤)에서 왔다고 풀이해 놨다. '하늘과 땅 사이 수많은 명산 중의 명산'이란 뜻이라 했다. 반면 1940년 쯤 씌어졌다는 '淸道文獻考'(청도문헌고)에는 이 산의 이름이 보다 흔한 '덕산'(德山)으로 나타나 있다. '운문산서 뻗어 나오는 산이면서 구만산이 뻗어나가는 산'을 지목하며 '덕산'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억산 덩어리의 최고점 높이는 해발 954m다. 그런데도 정상석(頂上石)은 944m로 적어뒀다. 그 바위엔 누군가가 까맣게 칠을 해 둬서 이채롭기도 하다. 하나 칠은 오래 갈 수 없는 것, 진작부터 조금씩 벗겨져 나가니 머잖아 칙칙해질까 걱정이다.
유명한 '억산바위'는 정점의 동쪽 부분에 해당한다. 칼로 잘린 듯한 그 직벽(直壁) 단애의 지형도 상 높이는 130m에 이른다. 옛 어른들이 일대를 '호거산'이라 불렀던 이유가 이 특이한 형상 때문일 가능성은 앞서 살핀 바다. 그러면서 산덩이 몸체 또한 20m 깊이의 홈을 사이에 두고 서편의 954m봉과 동편의 946m봉으로 쪼개져 있기도 하다. 그래서 붙은 이름은 '깨진바위'이다.
이 깨진바위에는 용이 되려다 좌절한 '꽝철이'의 전설이 맺혀 있다. 무대는 그 북편 대비골에 있는 대비사 절. 현재의 대비사는 고려시대에 옮겨지은 것이라 하니 이야기는 절이 더 아래쪽 박곡리 마을에 있던 신라시대 것일지 모른다.
그런 시절 대비사에서는 상좌스님 모습을 한 어떤 존재가 용이 되려고 수행하고 있었다. 그는 승천을 위해 운문사계곡 깊은 곳에 못을 만들기도 했으니, 이 시리즈가 앞서 '못안(골)'으로 지목했던 게 그 자리였다. '못골'이란 명칭도 저런 연유로 생겼으며, 거긴 대비골서 호거능선만 넘으면 쉽게 닿는 곳이다.
하지만 그 상좌는 성사 직전에 대비사 주지스님에게 정체를 들켜 승천에 실패한 채 꽝철이가 되고 말았다. 이제는 사람을 피해 달아나야 할 신세가 된 것이다. 그래서 화가 치밀어 꼬리를 내려 쳐 산을 쪼개버렸다. 그 산물이 '깨진바위'다.
그런 뒤 꽝철이는 운문분맥을 넘어 밀양 산내면 땅으로 도망 가 살았다. 새로 자리 잡은 그의 터전은 가지산 이야기 때 살핀 바 있는 '시례 호박소'다. 그 이유로 가물 때마다 호박소에서는 꽝철이를 쫓기 위한 기우제가 벌어진다. 점필재(점畢齋) 김종직(金宗直)이 '호박소'(臼淵)라는 시를 통해 비판한 바로 그 일이다. "아전에게 들으니 태수가 호박소 갔다네 / 거기에 용이 있어 비 오기를 빈다는구나 / 그러나 정말 백성을 생각한다면 / 본분을 다하는데 더 마음 쓸 일이라네…. "
저렇게 안타까운 사연을 간직한 억산 정상부를 지난 후 운문분맥은 제법 세게 내려서다가 5분여 후 헬기장에 닿는다. 해발 870m인 그곳은 동편 박곡리와 서편 오봉리를 가르며 내려서는 '억산북릉' 출발점이다.
이 지릉의 상징은 두 마을 바로 위에 솟은 579m봉이다. 그걸 박곡서는 '귀천봉'이라 하고 오봉리서는 '개물봉'이라 불렀다. 각 마을서 보는 느낌이 반영된 게 아닐까 싶다. 박곡리서는 신령스런 느낌까지 들 정도로 정면(남동쪽)으로 뾰족한 반면, 오봉리서 보기엔 그저 마을 뒤의 밋밋한 산등성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억산북릉은 매우 인기 있는 환종주 등산코스다. 박곡리 마을회관 앞에 차를 세운 뒤 이 산줄기로 들어서서 귀천봉을 거쳐 억산바위로 올랐다가, 억산재와 호거산 904m봉을 거쳐 호거능선으로 옮겨 탄 뒤 대비산으로 내려서서 그 서릉을 걸어 원점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깨진바위가 가장 가까이로 보이는 등 전망이 뛰어나 주위 살피느라 시간을 많이 뺏기기 일쑤인 노선이다.
억산북릉 출발점 헬기장을 지난 후 운문분맥은 한참 동안 오봉리 남쪽울타리로 역할 한다. 그 임무는 동편 금천면(오봉리)과 서편 매전면(남양리)의 경계능선이 내려서는 800m봉에 이를 때까지 지속된다. 이 구간 운문분맥은 헬기장서 단박 60여m를 내려선 뒤 대체로 810±30m대 높이를 오르내린다. 오봉리 공간은 그 도중 835m봉서 내려서는 지릉에 의해 동편 '사기점골'과 서편 '복잠골'로 더 나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게 분맥의 마지막 800m대 능선이다. 800m봉을 끝으로 그 기세마저 상실하는 것이다. 이후의 운문분맥 3.8㎞ 구간은 매전면 남양2리(임실마을) 남쪽 능선에 해당한다. 이 구간에선 오르내림이 다소 격해, 20여분 후 해발 555m의 '인재'로 내려앉았다가 10분 만에 668m 산덩이로 솟고, 또 586m재로 추락했다가 691m봉으로 되 솟는다. 691m봉은 매우 큰 '구만산' 능선이 남쪽으로 뻗어 내리는 시발점이다. 거기서 구만산을 거쳐 이어 가는 능선은 편의상 '구만능선'이라 불러둬 보자.
이렇게 펼쳐지는 억산 정상봉 이후 운문분맥에서 가장 중요한 주민 생활사의 현장은 '인재'였다. 이것이야말로 청도와 밀양 산내면을 잇는 주 통로였기 때문이다. 그걸 통해 청도 쪽 사람들은 산 너머 산내 팔풍장에 다녔고, 산내 사람들은 인재를 넘어 청도 동곡장을 내왕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양편은 각자에게 부족한 것을 채우고 다른 쪽에 부족한 걸 채워줬다.
양쪽 어르신들에 따르면, 그 시절 밀양 사람들은 소나 염소를 길러 동곡장에 몰아다 팔고는 소금을 사고 솥을 사 갔다. 지금이야 어디 가나 흔한 물건들이지만 그때만 해도 팔풍장에는 소금·솥 같은 게 귀한 반면 동곡장에는 수량도 많고 값도 쌌다.
또 청도 사람들은 사과·감 같은 과일을 이고지고 해서 산내 팔풍장에 가서는 쌀·보리쌀 등 곡물로 바꿨다. 지금은 산내 '얼음골사과'가 더 유명하나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그 쪽에는 사과나무라곤 없었기 때문이다. 청도로부터 사과를 사 먹던 밀양이 이제 더 유명한 사과 산지가 됐으니 말 그대로 상전벽해(桑田碧海)다.
그럴 때 옛 사람들이 그 높은 운문분맥을 어떻게 넘어 다녔을까 생각할 수 있겠으나, 어르신들은 "멀어봐야 30리 거리"라고 대수롭잖게 받아 넘겼다. 그 북편 청도 매전면 임실마을과 남편 밀양 산내면 인곡(仁谷)마을이 어렵잖게 이어진다는 뜻이다.
인곡마을과 인재를 잇는 길목은 억산 남부 별채와 구만능선 사이에 생겨 있는 '소매골' 골짜기이다. 봉의저수지 옆으로 이어지는 물길을 따라 난 낭만적인 그 소매골 소로를 유람하듯 걸어 올라도 한 시간 남짓 만에 인재 아랫부분에 도달됐다. 거기서 산으로는 갈 짓 자 모양의 생활로가 연결돼 비교적 힘을 덜 들이고도 10여분 만에 고갯마루에 이를 수 있었다. 인곡마을서는 이 옛길을 매우 중시해 오랜 세월 일부러 날을 잡아 보수하고 관리했었다고 했다. 좁은 오솔길이나마 그래도 풀을 베고 폭우로 팬 곳을 고치는 등 공을 많이 들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올라선 고갯마루서부터 북편 임실마을 사이는 오래 전부터 산판길이 나 있어 자동차까지 오르내린다. 그 길목은 '막터골'이라 불리는 바, 그건 청도 쪽 여러 마을 사람들이 막을 쳐 놓고 기거하면서 인재를 넘어 가 인곡 소매골에서 거름으로 쓸 풀이나 땔감을 베어 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막터골을 마감하는 더 서편 능선은 인재를 지나 솟아오르는 668m 산덩이서 북으로 내려서는 짧지만 뚜렷한 지릉이다. 거기에는 '벼락덤'이라 불리고 광산이 개발돼 있는 581m봉이 솟았다. 소매골에서 채취된 땔감은 인재를 넘고 벼락덤 아래 막터골을 거쳐 대구 남문시장으로 보내졌다는 얘기가 들렸다.
앞서 억산재를 팔풍재로 잘못 호칭하고 있음을 살핀 바 있지만, 팔풍장 길목임을 강조하려 든다면 인재야말로 그 이름으로 불릴 만한 재인 셈이다.
북편 청도 쪽에서는 억산바위·깨진바위 뿐 아니라 거기서 출발해 서쪽으로 이어가는 운문분맥 주능선이 매우 잘 보인다. 가지산은 전혀 안 보이고 운문산~호거산(962m봉) 또한 기를 써야 겨우 분간할 수 있던 그 이전의 동편 구간과 천양지차다.
글 박종봉 편집위원
사진 정우용 특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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