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부자라도 3대를 넘기기 어렵다는 '부불삼대'(富不三代)라는 옛말이 있다. 그만큼 선대가 일궈낸 재산을 후손이 지키기 힘들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조선 말엽부터 300여년 동안 12대째 부자 명성을 이어온 경주 최부잣집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부자 가문'으로 손꼽힌다.
가진 자의 바른 몸가짐으로 가문의 영광을 오랫동안 지킨 최부잣집의 전통 가정식으로 널리 알려진 경주 교동의 요석궁(중요민속자료 제27호). 이곳은 월성을 끼고 흐르는 남천 옆 양지바른 곳에 최부자 종가와 경주향교 등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즐비한 고택과 고목 등 빼어난 자연경관과 전통미가 일품인 한옥 요석궁은 형형색색의 꽃과 나무로 넓은 정원과 연못이 아름답게 단장돼 있고, 울려퍼지는 은은한 가야금 소리로 아늑함과 편안함을 더해 준다. 우리 고유의 멋이 살아 숨쉬는 호젓한 분위기를 배경 삼아 전통 코스요리를 맛볼 수 있는 매력 때문에 경주를 찾는 국내외 관광객은 물론 외국의 국빈급 손님들의 식사 장소로도 각광받고 있다.
◆대중화된 최부잣집의 전통 음식
다른 전통 음식점에 비해 독특하고 이색적인 요석궁의 장류는 이곳에 거주하는 최부잣집 며느리가 손수 제조하는 육장과 멸장, 집장이다. 고추장에다 신선한 육고기 등을 버무린 육장을 묵은 김치에 싸서 먹으니 별미다. 매콤하면서도 달콤하지만 잡내가 전혀 없다. 멸치와 무말랭이를 장조림한 멸장도 군침을 돌게 한다. 메줏가루와 부추, 무, 다시마 등을 혼합한 집장은 약한 가스불로 저어가면서 무려 12~15시간 동안 발효과정을 거칠 정도로 정성이 들어간다. 평균 한 달에 2번씩 집장을 만들 때면 조리사들은 불에 얹은 집장이 타지 않도록 밤을 새워가며 젓느라 파김치가 된다. 화학조미료를 일체 사용하지 않아 정갈하고 담백한 전통의 장류 맛을 느낄 수 있다.
'사인지'라는 이름이 붙은 물김치는 최부잣집 며느리들의 삶의 애환이 담겨 있다. 전국에 흩어져 있던 며느리들은 1년에 1번씩 경주 종가에 모여 물김치를 함께 만드는 오랜 전통이 있었다. 이때 가정생활 등을 화제로 서로 얘기꽃을 피운 사연으로 인해 사인지로 불렸고, 지금도 최부잣집 며느리가 시원하고 맛깔스런 물김치를 담가 손님 식탁에 올린다. 2년 동안 발효과정을 거친다는 묵은 김치는 의외로 매운 맛과 신맛이 강하지 않아 외국 관광객들도 즐겨 먹는다고 한다.
본격 요리로는 집안 대대로 귀한 손님이 오면 내놓는다고 해서 '진상 음식'으로 부르는 수란채가 눈길을 끈다. 전복과 문어, 해삼, 쑥갓 등을 섞어 끓인 뒤 계란 반숙을 넣은 수란채는 바다 내음과 쑥갓 향의 조화로 새콤달콤하고 그윽한 맛을 남긴다. 고유하고 독특한 조리비법을 자랑해 집안 대소사 때 빠지지 않는 음식이다. 송이전복조림은 특유의 송이향이 입속으로 퍼지면서 부드러운 전복과의 조화로 색다른 맛을 내고, 해풍에 말린 굴비로 조리한 굴비구이는 짠 듯하면서도 쫄깃쫄깃하다.
소고기, 은행, 명태전, 미나리전, 사골 등을 섞어 끓인 신선로는 예부터 여름철 몸이 약한 왕의 보양식으로 널리 알려진 음식답게 입맛을 잔뜩 돋운다. 울릉도산 명이나물과 수육, 채소, 배 등으로 쌈을 만든 산마늘잎말이와 비린내가 전혀 없는 소라밥 식혜도 구미를 당긴다. 정성스럽게 요리 손길을 거친 전복, 광어회, 장어구이, 황태찜, 명란젓, 황태장아찌, 홍어찜, 육회 등 풍성한 음식에다 요석궁의 별주인 약선주까지 곁들이니 포만감을 절로 느낀다. 상황버섯 등 7~9가지 한약재를 넣고 옛 항아리에 보온 숙성해 발효시킨 약선주는 맛이 깔끔하고 뒷맛이 시원해 여성들도 즐겨 찾는다. 알코올 도수는 13~15%로 반주로 적합하다.
◆국내외 관광객들로 붐비는 요석궁
음식 재료는 이곳에서 직접 재배하거나 시중에서 판매되는 무공해 친환경적인 최고의 품질을 고집한다. 정갈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전통 음식의 명예를 고수하기 위해 최부잣집 며느리가 일일이 식재료를 체크하는 등 팔을 걷어붙인다. 가격마다 음식 종류는 다소 다르지만 평균 20여종의 요리를 준비하려면 많은 시간이 소요돼 사전예약제를 원칙으로 한다. 음식을 담아내는 식기도 계절에 따라 달리하는 등 장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도록 고급만을 엄선한다.
200여년 된 고택을 간직하고 있는 최부자 종가와 붙어 있는 요석궁은 가장 한국적인 멋과 맛을 즐길 수 있다는 평판을 얻으면서 국내외 관광객들의 발길이 줄을 잇고 있다. 미국, 유럽, 일본, 중국 등지에서 경주를 찾는 관광객들은 최부자 종가를 둘러보고 요석궁에서 우리 음식을 맛보는 게 관광코스로 정착되고 있다. 취재진이 식당을 찾은 날에도 중국 관광객 10여명이 식도락을 즐겼다. 이들을 안내한 식당 종업원들은 "대부분 난생 처음으로 우리의 전통요리를 접하면서도 담백한 맛 때문인지 준비한 음식이 거의 동이 났고 묵은 김치를 더 달라고 성화다"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최부잣집 이야기를 소재로 최근 KBS에서 방영한 드라마 '명가'로 인해 이곳은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특히 방문객들은 종가와 요석궁에 마련된 안내문을 보면서 12대째 최부자집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원천에 대해 깊은 관심을 나타낸다. 요석궁 변경구 과장은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재산은 만석 이상 지니지 마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가진 자로서 없는 자를 착취하지 말라는 뜻)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검소하라는 뜻)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등 욕심 내지말고 정당하게 부를 축적하고, 어려운 이웃에 부를 적절히 나누라는 최부잣집의 6개 가훈을 엄수한 결과"라고 설명한다.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적극 실천한 최부자의 종가가 새삼 친근하고 따뜻하게 느껴진다.
향토음식산업화특별취재팀 최재수기자 biochoi@msnet.co.kr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권동순기자 pinoky@msnet.co.kr 강병서기자 kbs@msnet.co.kr 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사진 프리랜서 강병두 plmnb1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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