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록이 녹음으로 짙어져가는 우거진 솔밭 한가운데서 흰색의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인들이 한바탕 춤판을 벌이고 있다. 형형색색의 수목과 온갖 풀들에 에워싸인 은폐된 장소에서 모두 저마다 율동에 도취되어 무아경에 든 모습이다. 마치 은밀한 숲속에서 벌어진 이 낯선 광경을 맞닥뜨리고 숨어서 엿보게 된 듯하다. 사방 구부러지고 휘어진 나무들의 기묘한 형태는 그대로 가락과 신명을 표현하면서 오른쪽의 급하게 뒤틀어진 줄기처럼 이 장면을 감싸안는 구실을 한다. 춤을 추지 않고 앉아 있는 왼쪽의 두 명은 품새가 북이나 장구로 장단을 잡는 이 같고 몇 사람은 허리가 굽은 노인 같아서 노소가 함께 어울려 화목한 이상향을 이루었다.
고대의 전설에 나오는 아르카디아의 풍경도 화가들의 그림 속에서만 볼 수 있다. 서양에는 시대를 관통하며 내려오는 춤추며 노는 장면의 그림들이 있는데, 대개 바커스의 축제 같은 향연을 벌이는 장소들은 평화롭고 목가적인 배경을 선택한다. 현대의 마티스가 그린 '춤' 연작도 그 전통을 잇고 있지만 거기서는 배경은 생략한 채 누드의 남녀들이 둥글게 손을 잡고 춤을 추는 인상적인 형상만을 그렸다. 무아경의 남녀가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도는 그 장면은 뒷날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의 배경에서 거듭 인용된다. 숲속의 비밀스러운 장소로 들어갔다가 우연히 디아나의 목욕장면을 보게 된 악테온이 사슴으로 변하는 저주 이야기와 어쨌든 선녀를 아내로 맞는 우리의 나무꾼 이야기의 차이만큼이나 '유희'의 숲속 춤 주제는 우리 정서에 맞는 낙천적인 표현으로 마음을 사로잡는다.
한 무리가 추는 춤은 실제로 목격한 어떤 사건일 수도 있지만 현장에서 받은 인상을 그렸다고 생각되진 않는다. 원래 시대와 관계없이 그려지던 주제로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에 공통점이 있는데, 흔히 '자연'이 배경이고 그 중심에 인물들은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연극처럼 '인공'으로 짜여진다. 야외에서 벌이는 멋진 연회도 실제 세계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라기보다 간접적인 예술적 영감에 의존한 경우가 더 많다. 서양미술사에서 이런 장면들은 시각적 경험을 독립적으로 전한 것이라기보다 각 시대의 예술적 전통이나 사회적 관습으로부터 나온 문화적 메타포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이 작품의 경우는 어떠한가. 어떻게 이런 낙원을 가정했을까. 삶이 메마르고 황폐해갈 때, 전쟁의 공포나 두려움이 젊음을 위협해 올 때 그려본 꿈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꿈은 현실의 피안이다. 우리 근대미술사에서 또 한 사람 김중현도 비슷한 시기인 1941년에 '농악'을 주제로 사람들이 무리지어 무아경의 춤을 추는 그림 한 점을 그렸다. 그 모티프를 1960년대에는 박수근이 또 그렸다.
그러나 유화로 그려진 그림들과는 달리 이 작품은 수채화의 색채가 주는 투명함과 신선함을 생생하게 살리고 적절하게 사용된 짙은 색의 악센트로 즉석에서 완성하는 그림의 장점을 최대한으로 나타냈다. 푸른 녹색이 자아내는 환상적인 분위기에 붓질의 직접적인 느낌까지 고스란히 전달되어, 이인성으로 상징되는 대구 수채화의 전통을 상기시키면서 독자적인 자기세계를 개척한 성취가 느껴진다. 1940년 작으로 서명되어 있어 작가의 첫 개인전이 열린 21세 때 것임을 알 수 있다. 당시 그는 교사로 김천에 머물면서 일대의 많은 장소를 시대적 정서가 배어든 풍경으로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보나르 같은 느낌의 채색방식과 형태의 조형적인 굴절이 돋보이는 몽환적인 세계로 독특한 매력을 발산한다.
김영동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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