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농부로 사신 아버지의 자긍심은 6월에 한껏 고조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일개 병사의 몸으로 조국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고무적인 일이라고 판단하셨기 때문이다. 해마다 6월이 되면 어린 4남매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똑같은 전쟁 이야기를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들어야 했다. 그럴 때의 아버지 얼굴에는 스무 살 적의 피 끓는 청춘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갓 결혼해 처가에 머물던 아버지는 열여덟 살 어린 신부를 떼어놓고 전쟁터로 나갔다. 갑자기 쳐 내려온 공산군은 남한의 청·장년들을 예외 없이 군인으로 만들었다. 짧은 시간 동안 총잡는 법만 겨우 익혀 전투에 뛰어들었다. 지리산의 추위에 떨며 눈 녹인 물로 주먹밥을 해 먹었다. 밤마다 기습작전이 벌어졌고 고지 하나를 사이에 둔 채 뺏고 뺏기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어느 날 어머니는 한 통의 전보를 받았다. 아버지가 무릎에 관통상을 입고 국군통합병원에 있다는 소식이었다. 어린 신부에겐 차라리 희소식이었다. 이집 저집에 사망 통지서가 날아들고, 유복자 딸린 전쟁 미망인도 흔히 볼 수 있었던 때였다. 목발을 짚은 아버지는 입대 2년 만에 명예제대로 군 생활을 마감했다.
일부 상이용사들이 집집을 다니며 구걸하던, 어수선한 시절이 한동안 이어졌다. 국가보훈처가 발족하면서 그들의 생활도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폐단은 어디나 있게 마련이어서 가짜 유공자들이 버젓이 유공자 등록을 하기도 했다. 동네를 휘젓던 거간꾼들이 유공자 신청을 미끼로 꼬드길 때에도 부상을 이겨낸 아버지는 흔들림 없는 농사꾼으로 돌아와 있었다.
전쟁의 상흔은 시간이 지날수록 아버지의 무릎에서 되살아났다. 한 움큼의 약을 삼키고 스스로의 전적을 되새기며 위로를 삼는 것으로 당신의 고통을 잊으려하셨다. 날이 궂은 날 찾아오는 통증은 아버지의 남은 인내마저 깡그리 갉아먹을 것처럼 힘들게 했다. 당신이 드신 약을 한데 모으면 용연사 석탑을 열 개는 더 쌓았다고 어머니는 푸념삼아 말씀하셨다. 지금 내 곁엔 자랑스러운 '참전용사', 나의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다. 자긍심 가득하던 당신의 6월도 이제는 들을 수 없다.
한국전 발발 60주년을 맞았다. 전쟁의 참담함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은 세대는 세월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전쟁을 귀로만 전해 들은 우리는 그 잔혹함의 실체를 피부로 느끼지는 못한다. 전쟁기념관을 둘러보고 전적비를 순례하며 다만 잊지 않고 기억하려 할뿐이다. 다시는 물려주고 싶지 않은 민족의 아픈 유산이기에.
박월수<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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