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동에서] 전쟁이 두렵다

어릴 적 흑백TV로 봤던 '전우'란 전쟁드라마가 생각난다. 주인공 '나시찬'은 아이들에게 영웅이었다. 총알과 포탄이 빗발쳐도 나시찬은 결코 죽지 않았다. 불사신이었다. 적군은 무수히 쓰러졌지만, 아군의 피해는 항상 미미했다. 영웅을 보며, 승리를 보며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당시 동네 아이들과 패를 나눠 전쟁놀이를 즐겼다. 나무막대를 연결해 총을, 깎아서 칼을 만들었다. 솔방울은 수류탄이었다. 솔방울이 몸에 맞으면 기분이 나빴지만, 그래도 전쟁놀이는 신났다. 모든 아이들은 나시찬을 꿈꿨다.

'나만 죽지 않으면 전쟁은 해볼 만하고 가장 재미있는 놀이다.' 이처럼 무서운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전쟁에서 '나'는 항상 살아남을 수 있을까.

6'25전쟁을 통해 남북한 각각 100만명 이상의 인명피해를 입었고, 세계 1차대전에서 약 1천만명, 2차대전을 통해 약 5천만명이 죽었다. 그렇다면 한반도에서 다시 전면전이 발생한다면? 첨단 장비를 갖춘 현대전에서 그 피해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일 것이다.

1994년 '1차 북한 핵위기' 당시 미국 클린턴 행정부가 만든 전쟁 수행 시나리오(시뮬레이션)에 따르면 폭격기로 북한 핵시설을 폭격할 경우 북한은 전면전으로 대응한다. 개전 24시간 안에 군인 20만명을 포함해 수도권을 중심으로 약 150만명이 사상할 것이라고 나왔다. 전쟁이 확대되면서 남한은 예비군 400만명을 소집해 개전 5일 안에 전선에 투입하고 미 육군 130만명도 한반도에 집결한다. 세계 최고의 화력과 병력이 집중되면서 개전 1주일 안에 남북한 군인과 미군을 포함해 군 병력만 최소 100만명이 사망할 것으로 나타났다. 남한 측 민간인 피해는 더 심해 전쟁 1주일을 넘어서면 약 500만명의 사상자가 나올 것으로 예측됐다. 당시 이런 내용의 전쟁피해 예측 시뮬레이션 결과가 나오자 주한 미군사령관과 주한 미국대사가 백악관에 영변 핵시설 폭격을 중지해야 한다는 긴급 건의문을 보냈다.

나와 가족, 친지들의 생명이 보장될 수 없다. 전쟁에서 군인보다 민간인 피해는 항상 더 컸다. 이젠 전쟁에서 일방적인 승리, 일방적인 패배란 있을 수 없다. 전쟁터란 구분도 사라졌다. 안전한 곳은 더 이상 없다. '내'가 가장 먼저 죽을 수도 있다는 것. 더욱이 안타깝지 않은 죽음과 소중하지 않은 생명은 없다.

천안함 사태 이후 '전쟁'이란 단어가 자주 오르내린다.

"전쟁을 두려워하지도 않지만 전쟁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이명박 대통령은 최근 한'중'일 정상회담을 마친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같이 말했다. 국군통수권자로서의 당당함을 표현한 것이겠지만, 자칫 전쟁을 할 수도 있다는 뜻으로 비칠 수 있다. 국민들은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 대통령보다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막을 수 있는 대통령을 원할 것이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여당은 참패했다. 주요인은 천안함 사태 이후 북풍에 대한 정부와 여당의 대응에 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국민들은 대북 강경대응과 안보불안보다 평화와 안정을 택했다. 정부가 강경 일변도로 불안감을 키울 경우 금강산관광, 이산가족 상봉 등 상당기간 쌓은 남북관계의 토대가 허물어지고 개성공단 등 기업의 경제적 손실이 클 수밖에 없다. 대외적 국가신인도 추락으로 정치경제적 파급이 걱정된다.

치킨게임보다 바둑게임을 통한 승리가 필요한 시기이다. 대화와 타협이 없는 치킨게임은 파국만 몰고 올 뿐이다. 바둑에서도 무조건 상대방의 돌을 많이 잡기보다 싸우지 않고 자신의 집을 더 많이 지음으로써 승리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했으면 한다.

최근 드라마 '전우'를 리메이크한다는 소식을 통해 탤런트 나시찬을 주인공 이름으로 잘못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자신은 절대 죽지 않고 수많은 적을 격파하는 영웅에 대한 착각에서도 이젠 벗어날 때가 됐다. 불사신 나시찬은 전쟁의 공포와 끔찍한 죽음을 배제한 드라마 속 영웅일 뿐이다. 드라마나 영화속 감동적인 전쟁스토리와 현실을 혼돈해서는 곤란하다. 전쟁이란 괴물은 사람을 가려서 죽이지 않는다. 전쟁은 언제나 두렵다. 김병구 사회2부 차장 kb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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