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웃사랑] 유방암 투병 4년째 이갑연씨

"나홀로 살아온 기구한 운명, 내몸에 암덩이가…"

7살때 부모님을 여의고 학교 문턱조차 가보지 못한 채 홀로 기구한 삶을 살아온 이갑연(가명·55)씨는 현재 유방암(3기) 투병 중이다. 이씨는
7살때 부모님을 여의고 학교 문턱조차 가보지 못한 채 홀로 기구한 삶을 살아온 이갑연(가명·55)씨는 현재 유방암(3기) 투병 중이다. 이씨는 "모진 세월 혼자 견뎌내느라 얼마나 발버둥을 쳤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삶을 마감할 수는 없다"며 눈물을 훔쳤다.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저는 평생을 홀로 살아왔습니다. 어릴 적 한때는 단란한 가정의 막내딸이었고, 잠시나마 결혼이라는 것을 해보기도 했지만 온갖 풍파를 겪었습니다. 지금은 돌봐주는 이 하나 없는 외톨이가 됐습니다. 사람이 혼자 살면서 가장 서러울 때가 아플 때라고 하던가요. 4년째 유방암으로 투병하고 있는 저에게는 병마도 두렵지만 뼈에 사무치는 외로움이 더욱 저를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부모님 여의고 천덕꾸러기가 된 막내

저(이갑연·가명·55)는 대전에서 2남 2녀의 막내딸로 태어났습니다. 위로 오빠가 둘 있었고, 저와 띠동갑 큰 언니도 있었지요. 어렸을 때는 늦둥이란 이유로 온갖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곱게 자랐습니다. 부유한 가정은 아니었지만 가족이 함께 살을 부비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도 잠시였습니다. 7살 무렵 부모님이 병마로 잇따라 세상을 떠나면서 저의 힘겨운 삶은 시작됐습니다. 지독한 가난은 혈육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었고 저는 큰언니를 의지 삼아 살아야 했습니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삶에 학교라고는 문턱조차 가보질 못했습니다.

16살이 되던 해 저는 결혼을 했습니다. 너무 철이 없었던 짓이었지요. 제 인생이 망가질 것은 생각지도 못한 채 그냥 배곯는 것이 너무 싫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열 살 많은 남자를 따라나섰습니다.

당시 남편은 이미 결혼을 해 아이까지 셋 딸린 사람이었지만 그런 것은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돈이 많은 좋은 사람이라고 했고, 배불리 쌀밥을 먹여주겠다는 감언이설에 귀가 어두웠던 것입니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쉽지 않았습니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빈털터리 남편은 늘 술과 여자를 끼고 살았습니다. 걸핏하면 제게 폭력을 휘두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5년을 시달리다 어느 날 집을 뛰쳐나오고 말았습니다. 집을 나올 때 제 수중에는 한 푼도 없었지만 당장 '맞지 않고 살아남아야겠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운도 지지리 없는 고달픈 인생

돌아갈 곳도, 의지할 형제도 없었던 저는 22살이 되던 해 고향땅을 버리고 경북 안동에 새 둥지를 틀었습니다. 생전 가 본적도 없던 안동 땅까지 흘러갔던 것은 다시는 남편이 저를 찾지 못하도록 꼭꼭 숨기 위해서였습니다. 맞아 죽는 것보다 타지에서 외롭게 사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었지요. 사실 저를 돌봐 줬던 큰언니와는 결혼을 하면서 떠나온 이후 다시는 연락이 닿질 않았습니다. 오빠 2명도 마찬가지죠. 어디서 뭘 하고 살았는지 소식을 듣지 못하다가 뒤늦게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만을 확인했습니다.

무작정 도망을 치긴 했지만 글자조차 모르는 까막눈의 20대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거의 없었습니다. 식당 주방일이 고작이었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악착같이 일을 했고, 끼니는 식당에서 남은 음식으로 채웠습니다.

그렇게 20여년을 일하고 나니 수중에는 꽤 많은 돈이 모였습니다. '이 돈이면 새 삶을 살 수 있겠구나'는 생각이 들면서 처음으로 '희망'이라는 것도 가져보게 됐습니다. 하지만 제 인생에는 무슨 마가 끼어있는 것일까요. 배운 것이 식당일뿐이라 식당을 개업하기로 마음 먹고 차근차근 준비를 하던 와중에 사기꾼에게 속아 가진 돈을 다 날리고 말았습니다. 저는 또 다시 몸도, 마음도 빈털터리가 됐습니다.

◆암덩이가 유일한 가족

지금까지 악착같이 살아왔던 세월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자 저는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걸고 저를 알아보는 이 하나 없는 문경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한 달에 4만원, 4평 남짓한 쪽방이 새 보금자리가 됐습니다. 더는 상처받기 싫어 간신히 끼니를 잇고 숨을 잇는 것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틀어박혀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슴에 묵직한 게 잡혔습니다. 2007년 3월이었습니다. '나 같은 건 살아서 뭐해'라고 모든 걸 포기했던 삶이었지만 막상 죽음이 눈앞에 다가오니 덜컥 겁이 났습니다. 이렇게 죽기는 싫었습니다. 혼자 그 모진 세월 견뎌내느라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삶을 마감할 수는 없다는 오기가 치솟았습니다.

병을 숨기고 식당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하루 종일 일을 해 하루 고작 1만5천원을 받았고, 하루를 일하면 몸이 아파 일주일을 쉬어야 했지만 이를 악물고 돈을 모았습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수술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살았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도 잠시였습니다. 끈질긴 암 덩이는 2009년 다시 저를 찾아왔습니다. 유방암 3기였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 제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가족도, 친구도 없고 암 덩이만이 저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병원비를 감당할 능력도 없습니다. 기초생활수급자가 됐지만 16살에 결혼했던 남편의 아이 셋이 제 호적에 등록돼 있어 한 달에 고작 15만원의 정부지원금만을 받다보니 문경에서 대구 병원을 오가는데 드는 차비 1만5천원도 부담스러운 상황입니다.

굴곡 많고, 사연 많은 제 인생에 행복이라는 것을 한 번도 느껴보지도 못한 채 이대로 마감해야 하는 것일까요? .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인생의 재미를 한번 느껴보고 싶다는 것은 제게 너무 과분한 욕심일까요?.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황수영 인턴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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