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권2 '흥법'(興法)은 경주를 가리켜 '사사성장 탑탑안행'(寺寺星張 塔塔雁行)이라고 적고 있다. 절은 하늘의 별만큼 많고 탑은 기러기떼처럼 줄지어 서 있다는 뜻이다. 경주에서 불교가 얼마나 번창했는가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이다. 그 불교 융성의 중심에 남산이 있었다. 산은 너른 품안에 많은 사찰과 불교사상을 깃들이며 민족문화의 요람으로 자리 잡았다. 남산은 신라의 천년 흥망성쇠를 말없이 지켜본 산이다. 사로국을 세운 박혁거세의 탄생설화가 있는 나정(蘿井)부터 신라 멸망의 역사 현장인 포석정까지 숱한 유물'유적들이 남산자락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남산을 일컬어 '천년 노천박물관'이라고 한다. 1천810만㎡(540만평) 자락에 절터 150곳, 석불'마애불 129기, 탑 99기 등 모두 694점의 유적이 분포돼 있다. 이 후광에 힘입어 1968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후 1985년엔 산 전체가 사적(311호)으로 지정됐다. 2000년에는 역사유적지 최고 영예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신라인들은 왜 남산에 불교 유적을 집중시켰을까. 전문가들은 삼국통일 과정에서 전화(戰禍)에 시달린 민중들이 종교에 귀의하여 위안을 얻고 전쟁에 희생된 가족들을 추모하려는 제의(祭儀)에서 비롯됐다고 보고 있다. 때마침 대중불교를 표방한 원효의 등장은 이런 사조에 큰 동력을 제공했다.
#남산의 유물은 민중들의 자발적인 예술행위
남산은 유물들의 성격상 민중불교의 현장에 가깝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전문 석공들에 의해 제작된 것이 아니고 민중들의 자발적인 예술행위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완의 작품들이 많고 완성도도 떨어진다. 왕과 귀족들이 불국사, 황룡사, 석굴암 등 국가 사찰에서 불공을 드릴 때 민중들은 남산으로 올라 석불 앞에서 합장했다.
6월 초여름 신록이 벌판을 물들일 무렵 취재팀은 그동안 미루었던 경주로 향했다. 등산로는 삼릉계곡-상선암-금오산-포석정으로 돌아오는 코스로 잡았다. 남산의 불교 유적들을 두루 돌아볼 수 있는 코스다.
삼릉계곡으로 들어선다. 빽빽한 소나무 숲이 짙은 그늘을 만들어 산행 길은 무척 쾌적하다. 이름의 유래가 된 '3릉'은 8대 아달라왕, 선덕왕, 경명왕의 능으로 알려져 있다.
계곡에서 처음 만난 부처는 머리와 손이 잘려나간 석조여래좌상. 훼손된 부처를 대하니 탄식부터 앞선다. 누굴까. 신성한 불두(佛頭)를 날린 반문명의 범죄를 저지른 자는. 학자들은 숱한 외침, 조선시대 숭유억불의 국시(國是), 일제의 문화재 약탈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또 산에 노출된 불상들의 수가 워낙 많아서 그만큼 피해가 컸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지척의 거리에 선각육존불이 있다. 두개의 바위 면에 여섯 부처님을 음각해서 모셨다. 넉넉한 표정과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한 옷 주름이 정으로 쪼았다기보다는 마치 붓으로 그려 놓은 듯하다.
왼쪽 능선을 따라 오른다. 삼릉계석불좌상(보물 666호)이 온화한 미소로 일행을 반긴다. 원래 모습을 잃은 채 방치되다가 2008년 말 보수공사를 통해 제 모습을 찾았다. 전문가들은 석굴암 본존불에 견줄 만한 예술성과 규모를 갖추었다고 말한다.
#돌 속에 깃든 부처를 밖으로 불러낸 석공들
다시 등산로로 접어든다. 뙤약볕 급경사를 30분쯤 올랐을까. 안부에 비좁게 자리를 튼 상선암이 나타난다. 암자 그늘에 잠시 땀을 식힌 후 마애석가여래좌상으로 향한다. 금오봉 쪽으로 시야가 열리며 바위에 새겨진 불상이 무상(無常)의 얼굴로 일행을 맞는다. 산중턱인데도 북서쪽이 트여 기린천 쪽 평야가 시원스럽게 펼쳐졌다. 마애석가여래좌상은 천연 바위에 부조(浮彫)의 형태로 양각한 불상이다. 얼굴은 바위에서 반쯤 튀어 나왔고 아래로 향할수록 선으로 그려져 몸은 바위 속에 있는 형상이다. 막 부처가 바위에서 나오는 순간을 포착한 듯하다.
문화유산해설사 윤희씨는 "신라인들은 바위를 찾아서 부처를 조각한 것이 아니고 돌 속에 깃든 부처를 찾아 밖으로 불러낸 것"이라고 설명한다. 무소부재(無所不在)의 신, 민중들은 산 속 곳곳에서 자신을 가호(加護)하는 부처를 느끼며 안식을 찾았던 것이다.
원만한 능선을 따라 20분쯤 걷는다. 드디어 금오산 정상이다. 넓은 평지에 정상석만 덩그러니 서 있는 금오봉(468m)은 밋밋했다. 사방이 숲으로 막혀 조망도 없고 편안히 쉴 그늘도 없다. 뙤약볕을 피해 서둘러 하산을 서두른다. 임도가 시원스럽게 뚫린 금오정-포석정 코스로 접어든다. 이 길은 잘 닦인 임도를 쾌적하게 걸을 수 있지만 골골에 숨어 있는 유적들을 지나쳐야 하는 단점도 있다. 노인과 피리소녀의 전설이 가슴을 여미게 하는 상사바위를 지난다. 소녀의 슬픈 넋을 위로하는 듯 저 멀리 문천은 느리게 굽이쳐 흐른다.
#포석정은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신성한 곳
윤을골을 지나 포석정에 이른다. 이 자리는 옛 왕실의 행궁(行宮), 즉 별장터다. 포석정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신라의 독창적인 유적으로 손꼽힌다. 용도에 대해 여러 가지 학설이 있지만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로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수로를 굴곡지게 하여 흐르는 물 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읊는 놀이)의 흔적이라는 게 중론이다. 이 때문에 포석정은 귀족들의 향락문화의 한 형태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 학자들의 연구는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포석정은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고 왕족들이 혼례를 올리는 신성한 장소였다는 것이다. 또 1998년에 '포석'(砲石)이라는 와편이 출토되면서 이곳이 화랑세기에 나오는 포석사(鮑石祠)라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됐다. 이런 신성한 장소에서 경애왕이 주연을 즐기다가 견훤에게 최후를 맞았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납득하기 어렵다.
문화유산해설사 윤희씨는 "경애왕은 당시 포석사당에서 신에게 국운을 비는 제사를 지내던 중 왕건의 구원군을 기다리는 과정에서 참사를 당했다"고 설명했다.
천년의 세월을 넘어 포석정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지금도 여기에 물을 부으면 '유상곡수연'의 재현이 가능하다고 한다. 관광객들은 아직도 이곳에서 신라 왕족의 유흥의 흔적을 떠올린다. 방탕한 신라 귀족들의 상징쯤으로 전락해버린 포석정, 언제쯤 이런 누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글'사진 한상갑기자 arira6@msnm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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