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끝나지 않은 6·25] ⑪ 영덕·포항·안강 공방전

뺏고 뺏기는 포항 혈투, 형산강 시뻘건 피로 물들어

미 제24사단 5연대 전투단이 수중다리 위로 금호강을 건너고 있다.
미 제24사단 5연대 전투단이 수중다리 위로 금호강을 건너고 있다.

1950년 8월 5일. 낙동강 교두보의 동쪽 거점인 동부전선 영덕지구를 방어하고 있던 국군 제3사단은 개전 이래 줄곧 동해안을 타고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온 적 제5사단을 맞아 연일 혈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대구에서 동북으로 80km 떨어진 영덕지구는 지형상 앞에 동해바다가 탁 트여 있으나 배후에는 청송·영양·안동으로 뻗어나간 험준한 산악지대가 가로 막혀 있었다. 적의 진공로는 동해안 도로를 타고 포항으로 쳐들어가는 국도와 안동·의성·영천을 거쳐 대구의 배후를 찌르는 국도 등 두 길밖에 없다. 따라서 아군은 이 두 길목만 막으면 적의 침투를 충분히 방어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이미 영덕에 배치된 3사단 외에 안동에서 철수한 8사단과 수도사단을 내륙 도로 교차점인 의성을 중심으로 방어망을 구축하도록 했다.

그러나 적 8사단은 안동을 점령한 이후 내처 의성으로 진로를 틀어 아군 8사단과 수도사단을 끈질기게 추격 중이었고 적 5사단이 영덕으로 밀고 들어가는 동시에 8사단에 이어 안동으로 들어온 적 12사단은 청송을 거쳐 포항으로 방향을 틀었다. 당초 안동을 우회 포위하려던 766군 유격부대도 아군이 안동을 포기하자 다시 동해안으로 빠져나와 포항을 거쳐 안강으로 진격하기 위해 비학산 일대로 집결했다.

이 작전은 제2집단군(일명 무정군단) 사령관 김무정 중장의 전략에서 나왔다. 그는 국공내전 당시 중국 팔로군의 조선의용군 총사령관 출신으로 게릴라전법에 능했던 인물이지만 연안파의 우두머리라는 이유로 소련파에 밀려 한직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가 개전 초 중동부 전선에서 2사단과 7사단이 아군 6사단의 주도면밀한 방어작전에 말려들어 치명상을 입고 전선의 균형 유지가 어려워지자 대로(大怒)한 김일성이 김광협 제2집단군 사령관을 해임하는 바람에 그 후임으로 부임했다.

그래서 그는 당장 김일성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766군 유격부대에 포항으로 진격해 형산강교를 폭파하고 미 제5공군의 출격기지인 오천비행장과 후방 기지로 활용되고 있는 구룡포항을 봉쇄하도록 명령했다. 그뿐 아니라 766군 유격부대는 김무정으로부터 안강을 거쳐 대구 남방의 청도로 침투해 경부선 철도보급로인 청도 터널(일명 남성현 터널)을 폭파하라는 임무까지 부여받고 있었다. 만약 이 두 개의 작전이 성공할 경우 아군에는 치명적인 타격이 아닐 수 없다.

영덕지구 전투는 사실상 7월 중순부터 상황이 전개되었다. 적의 공세가 워낙 강력해 같은 달 24일에는 제23연대가 강구까지 밀려나 공방전을 벌인 끝에 강구 후면 181고지를 탈환했으나 하루 만에 빼앗기자 연대장 김종원 중령(별명 백두산 호랑이)은 그 책임을 물어 소대장 1명과 하사관 1명을 즉결처분했다. 이 사실이 미 고문단에 알려져 김 중령이 해임되는 사태까지 몰고 왔다.

게다가 8월 6일 22연대가 181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야간공격을 감행하고 있을 무렵 사단 전방지휘소에 적의 포탄이 날아들고 전사자가 속출했다. 이때 작전을 지휘하던 이준식 사단장과 참모들이 주변의 개인호 속으로 잠시 피신했으나 이 사실이 워커 미 8군 사령관에게 잘못 전해져 사단장까지 지휘소를 비웠다는 이유로 해임되고 말았다. 후임 사단장은 안동지구 전투에서 김백일 부군단장과 적전 분란을 일으키고 수도사단장에서 해임되었던 김석원 장군.

그러나 김석원 사단장이 부임하자마자 적 5사단의 주력이 해안선을 끼고 강구쪽으로 우회해서 남진하는 바람에 181고지 탈환작전에 나섰던 22연대가 적의 공세에 밀려나고 만다. 이 과정에서 적의 남진을 저지하는 데만 급급했던 연대장 강태민 중령은 아군의 철수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은 채 강구 오십천교(五十川橋)를 조기 폭파해 버렸다. 한강교와 안동교에 이어 아군의 희생을 자초한 세 번째 조기 폭파였다.

이 때문에 미처 다리를 건너지 못한 2대대 병력 350여명은 강구 북쪽 해안에 갇혀 바다로 뛰어들었다가 무더기로 익사하고 만다. 이 사건으로 연대장 강 중령마저 해임되는 등 아군 3사단의 고위급 지휘관들이 작전 잘못으로 잇따라 해임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비운의 3사단은 미 해·공군의 지원을 받아가며 고군분투했으나 결국 영덕과 강구를 잃고 후방 퇴로마저 막혀 버렸다. 안동에서 청송을 거쳐 내려온 적 12사단이 우회해서 포항으로 공격해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 무렵 동해에 출동한 미 해군 순양함 미주리호를 비롯한 구축함 3척이 영덕 해안과 포항 흥해 해안을 향해 8인치 함포와 16인치 주포로 밤낮없이 함포를 쏴 댔다. 그러나 지·해·공(地海空)의 관측 차질로 명중 효과가 적어 적진을 침묵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오히려 오폭으로 흥해·청하·송라 일대의 민가에 많은 피해를 입혔다. 3사단이 철수할 길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남(적 12사단)·북(적 5사단)·서(적 766군 유격부대)쪽 등 3면에 포위돼 있었고 동쪽은 바다밖에 없기 때문이다.

부임하자마자 사면초가에 몰린 김석원 사단장은 고민 끝에 가까스로 육군본부와 연락이 닿아 8월 14일 "LST(해군수송함) 4척을 보낼 테니 해상으로 철수하라"는 극비의 명령을 받고 영덕 남방 장사 해안에서 철수하기 위한 양동작전에 들어간다. 아군이 마치 대대적인 반격작전에 돌입한 것처럼 모든 장비를 동원하고 야간에 불을 훤히 밝힌 트럭 행렬을 오르내리게 하며 위장전술로 적의 공세를 저지하는 한편 3사단 병력과 경찰 1만여명 외에도 주민 1천여명까지 구룡포항으로 무사히 철수시킨 것이다.

구룡포항에 상륙한 아군 3사단은 8월 17일 숨 돌릴 사이도 없이 즉각 포항 방어전에 투입되었다. 포항이 적의 수중에 떨어지면 낙동강 교두보에 대한 공중지원기지인 오천비행장을 포기할 수밖에 없고 낙동강 전선도 파국적 위기에 직면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포항 방어전에는 미 8군 예비별동부대인 브래들리 부대가 투입된 데 이어 진주에서 작전 중이던 민기식(전 육군참모총장·당시 대령)부대(이하 민 부대)에도 급파 명령이 떨어졌다. 그 만큼 포항 방어전이 위급했다. 이들 두 별동부대는 미 해·공군의 지원을 받으며 방어전에 돌입했으나 병력과 화력의 열세로 고전 중이었다.

특히 민 부대보다 먼저 도착한 브래들리 부대가 오천비행장을 사수하기 위해 효자동 방면의 동해남부선 철도 터널 주변에서 형산강을 건너려다 비학산을 넘어온 적 766군 유격부대의 기습을 받고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그러나 첫 교전에서 적의 화력에 견디다 못해 100여명의 희생자를 내고 효자동을 거쳐 형산강교 방면으로 철수했다.

이때 구룡포에서 오천으로 이동한 3사단은 지휘소를 오천비행장 입구인 찬내(현 포항시 청림동)에 설치하고 23연대를 형산강으로 급파했다. 불과 100여미터의 접전거리를 두고 강 건너 브래들리·민 부대가 협공작전으로 형산강교를 탈환했으나 희생이 너무 컸다. 죽어 나자빠진 적 기관총 사수들의 발목이 하나같이 쇠사슬로 묶여 있는 것으로 봐 독전대에서 일선 전사들의 후퇴를 막기 위해 무자비한 만행을 저지른 것 같았다. 피아 간에 전사자가 속출하고 형산강을 물들인 시뻘건 피가 포항 앞바다로 쓸려갔다.

이용우(언론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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