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이구나, 아빠는 괴로워"…이 시대 아버지像

시대적으로 가부장적 문화에서 탈피, 좀 더 따뜻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아버지를 원하면서 아버지학교에 등록, 아버지 역할에 대해 공부하는 남성들이 늘고 있다. 사진은 두란노아버지학교 대구지부의 교육 모습. 사진제공:두란노아버지학교 대구지부
시대적으로 가부장적 문화에서 탈피, 좀 더 따뜻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아버지를 원하면서 아버지학교에 등록, 아버지 역할에 대해 공부하는 남성들이 늘고 있다. 사진은 두란노아버지학교 대구지부의 교육 모습. 사진제공:두란노아버지학교 대구지부

회사원 정모(38)씨는 주말 아침 "오늘 애 데리고 어디 갈 거야"라는 아내의 말이 겁나기만 하다. 정씨에게 토요일은 빡빡한 직장 생활을 뒤로하고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황금 같은 날이다. 침대에서 원 없이 '시체놀이'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하다. 자칫 아내에게 "오늘 좀 쉬자. 당신이 애 데리고 나갔다 와"라고 하면 곧바로 "누구집 아빠는 그렇게 가정적이라는데…" "그럼 우리 갔다올 동안 집안일 다 해놔" 등 보복성 발언이 잇따른다. 이 때문에 정씨는 주말에도 쉴 수 있다는 희망을 갖지 않는다.

이 시대 아버지들은 불쌍하다. 과거처럼 아버지라는 이유로 가정에서 큰소리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가정을 책임지는 일에서 크게 해방되지도 않았다. 주말에도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밖에 없는 게 요즘 아버지들의 모습이다. 그런 희생을 감내하지 않으면 곧 나쁜 아버지로 인식되는 것이 요즘이다.

◆주말은 괴로워

"정말 서럽습니다. 초등학생 딸 둘이 학교를 가는 토요일에는 같이 아침을 먹을 수 있지만 아이가 학교 안 가는 놀토에는 배가 고파도 토요일 아침에 밥 달라는 이야기를 못하겠더라고요. 아내는 평일 가정의 모든 것을 자신이 맡았으니 주말에는 당신이 알아서 하라는 생각이죠. 토요일에 아침 차리는 일로 몇 차례 싸운 적도 있지만 이제는 아예 포기하고 제가 대충 먹어요." 회사원 박모(47)씨는 이런 주말의 괴로움이 평일에 대부분 늦게 집에 돌아오는 일이 반복되면서 아내에게 미운털이 박혔기 때문이라고 했다. 박씨는 "토요일에 집에 퍼져 있기라도 하면 아내의 잔소리가 정말 많아진다. 그런 모습이 그렇게 못마땅한 모양"이라고 했다.

성서공단 자동차부품회사에 다니는 신모(37)씨는 주위에 취미를 갖고 있는 사람이 무척 부럽다고 했다. 주말에 자기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신씨는 "회사에 야구동호회가 있어 가입하고 싶어도 엄두가 안 난다"고 했다. 아들 둘을 각각 초교와 어린이집에 보내는 신씨는 간호사인 아내가 토요일에 근무를 자주 나가기 때문에 자신이 아이들을 책임질 때가 많다. 신씨는 "큰아이가 학교 가는 날에는 토요일에도 오전 7시에 일어나 아침을 먹이고 학교에 보낸 뒤 둘째 아이와 책을 읽거나 놀아준다"고 했다. 아내가 근무 가는 날에는 대개 오후 6시까지 이 같은 일에 매여 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아내의 핀잔이다. 신씨는 "몸이 피곤해 아이와 대충 놀아주거나 귀찮아하면 아이들은 엄마 오기만 기다린다. 그런 애들의 모습을 본 아내가 잔소리를 안 할 리가 있겠느냐"고 했다.

공무원 김모(42)씨는 "토요일 방바닥에서 뒹구는 것이 눈치가 보여 옷을 대충 걸쳐입고 주변 공원을 산책하거나 근처 목욕탕에서 시간을 때울 때가 많다"며 "점점 나를 위한 시간이 줄어드는 것 같다"고 했다. 이 때문에 아예 일을 핑계로 휴일에 출근하는 직장인들도 적잖다.

많은 30, 40대 남성들이 이 같은 처지지만 과거처럼 권위를 내세우거나 크게 반발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당장의 가정 불화도 문제이거니와 잘못했다가는 노년이 외로워지거나 비참해질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신씨는 "지금도 애들이 엄마만 따르는데 잘 돌봐주지 않으면 가정에서 버림받는 처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주변에서 이런 현상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김모(57)씨는 지난해 퇴직한 뒤 집안에 자신의 자리가 없다는 생각에 최근 외로움을 많이 느낀다. 30년을 넘게 직장을 다니며 아이들 공부시키고 결혼까지 시켰지만 아이들은 엄마와 모든 것을 의논할 뿐이다. 아내도 마찬가지다. 퇴직 후 집에 들어앉으니 아내는 계모임이다, 동아리 활동이다, 각종 사회생활로 바빠 자신을 귀찮게 여긴다. 김씨는 "평생을 가족을 위해 희생한다는 생각으로 일했는데 정작 집안에 내 자리는 없는 것 같아 씁쓸할 뿐"이라고 말했다.

◆변해야 산다

많은 아버지들이 서글프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으니 거기에 적응해 살 수밖에 없다. 지금의 아버지들은 사회변화의 흐름을 직시하고 과거의 가부장적 사고에서 탈피, 좀 더 따뜻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고 요구받고 있다.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 아버지학교에 등록을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공부하는 가장들도 늘고 있다. 대구의 경우 두란노아버지학교나 성요셉아버지학교 등에서 일정 기간 아버지 관련 강좌를 들으면서 자신의 역할을 되돌아보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자영업을 하는 전수연(44)씨는 한때 누구보다 사회생활에 비중을 많이 뒀다. 사업과 각종 모임 등으로 인해 술을 마시는 날이 잦았고 가정은 뒤로 밀렸다. 이 때문에 아내와도 갈등이 심했다. 하지만 아버지학교를 다니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전씨는 "어느 순간 내 모습을 돌아보니 권위적이라 싫어했던 내 아버지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며 "아버지학교 프로그램에 참가해 보니 가족을 위해 나를 희생하면 가족뿐 아니라 나 자신도 행복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우선 그는 술자리를 확 줄였다. 과거에는 일주일에 2, 3차례 했던 술자리를 지금은 한달에 2, 3차례 정도 하고 있다. 꼭 가야 할 모임이나 약속만 가고 술을 마시더라도 자정을 넘기지 않는다. 주중에 가족들과 상의해 토요일에 갈 곳을 정한 뒤 토요일 아침 일찍 또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즉시 집을 나서는 습관을 들였다. 가족들과 여행을 즐기다 보니 강원도부터 제주도까지 가보지 않은 곳이 없다. 행선지는 한발짝 물러나서 아이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정한다. 전씨는 "처음엔 힘들었지만 이 같은 생활 패턴이 습관화되니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다"며 "딸들이 나를 많이 따르고 아내의 신뢰도도 무척 높아진 걸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아버지학교를 수료한 회사원 임종필(40)씨도 가족이 우선이다. 임씨는 "집 분위기가 좋지 않으면 직장이든 모임이든 어딜 가도 마음이 편치 않다. 반면 밖에 문제가 있으면 아내에게 털어놓으면서 풀 수 있다"고 말했다.

성요셉아버지학교 김중률 스테파노 신부는 "우리 시대에는 인간적으로 완성된 아버지의 모습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아버지들도 자신의 아버지 때의 모습에서 탈피해야 하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도 갖춰져야 한다"고 말했다.

전창훈기자 apolon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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