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책 한 권을 세상에 내어놓으니 여러 반응이 왔다. 그 가운데 한 친구의 반응이 가장 힘이 되고 기억에 남는다. 친구는 퇴근하여 배달된 책의 봉투를 뜯고서는 그 자리에서 책을 읽기 시작하였다. 다 읽고 나자 문득 관계가 소원해진 어떤 이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졌다. 그래서 곧장 전화를 하였다. 책을 읽고 나니 자존심과 많이 흘러버린 시간으로 인해 용기가 나지 않았던 그 전화를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 친구는 나에게 책 내용이나 문장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책을 덮는 순간 마음이 요동쳤다고, 주변을 둘러보게 되었다고, 그저 그렇게 말하였다. 내내 미루어두었던 전화를 아주 쉽게 했다고 하였다.
한 영화가 생각난다. 오래된 영화 '파리, 텍사스'다. 젊고 아름다운 아내에 대한 강박적 집착으로 인해 자신의 가정을 망가뜨린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라이 쿠더의 스산하고도 여백 많은 기타 소리는 영화의 내용과 절묘하게 어울렸다. 또한 그것과 더불어 잊히지 않는 장면이 하나 있다. 4년 만에 어린 아들을 다시 만난 남자는 아들과 친해지고 싶어 매일 학교 앞으로 마중을 나간다. 하지만 아들은 아버지가 저를 데리러 온 것을 뻔히 알면서도 친구 엄마의 차를 타고 가버린다. 날이 갈수록 아들은 아버지가 진심으로 자신에게 다가오고 싶어한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제 아들은 친구네 차를 타지 않는다. 그래도 길 건너편에서 기다리는 아버지에게 선뜻 건너가지 않는다. 아버지를 흘낏 보고는 그냥 집을 향해 걷는다. 아버지와 아들은 차도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의식하면서 집을 향한다. 계속 걷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버지가 차도를 가로질러 아들에게 다가온다. 아들은 기다렸다는 듯 기꺼이 아버지와 동행한다. 아버지가 차도를 성큼성큼 건널 때 나의 가슴 가운데 부분이 저려왔다. 사랑은 저와 같이 가로지르는 용기가 필요한 행위라는 생각을 하였다. 얼른 가로지르고 싶지만 상대방의 마음 문이 열리도록 기다리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상대의 마음에서 경계가 사라질 시간을 견디는 것, 이제 그만 기다릴 때를 알아 길을 가로질러 상대를 뜨겁게 품는 것, 이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할 것이다.
어느 초여름 저녁 나의 친구는 가로지르기를 하였고, 다시 옛 친구를 찾았다. 영화 속의 남자도 집에 도착하기 전 알맞은 때에 길을 건넜다. 아들의 용서를 받았고 화해하였다. 전화로 가로지르든, 길을 가로지르든, 혹은 바다를 가로지르든, 적절한 때의 가로지르기는 사랑을 완성시킨다.
추선희<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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