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동행-경북을 걷다] <25>청도 남산골

흩어지는 물보라에 꽃잎이…굽이마다 詩情이…

계곡 위쪽으로 가기 전에는 비교적 평탄하게 마무리된 산책로를 만끽할 수 있다.
계곡 위쪽으로 가기 전에는 비교적 평탄하게 마무리된 산책로를 만끽할 수 있다.
작가와 함께 = 청도군청 임형수(왼쪽)씨가 강주영 화백에게 청도 석빙고 옆에서 남산계곡 가는 길을 설명하고 있다.
작가와 함께 = 청도군청 임형수(왼쪽)씨가 강주영 화백에게 청도 석빙고 옆에서 남산계곡 가는 길을 설명하고 있다.
석빙고 = 보물로 지정된 청도 석빙고는 전국에 남아있는 석빙고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석빙고 = 보물로 지정된 청도 석빙고는 전국에 남아있는 석빙고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강주영 작-남산계곡
강주영 작-남산계곡

며칠째 푸석푸석한 마른 날이 계속 되더니 비가 내렸다. 이틀 연속 퍼부었다. 그런데도 아직 미련이 남았는지 숨을 들이쉴 때마다 물내음이 가득하다. 더럽혀진 땅바닥을 닦고난 물걸레를 천장에 집어던져 놓은 듯 시커먼 먹구름 천지다. 신호탄만 울리면 금세 물줄기를 쏟아부을 기세다. 구름이 떼거리로 몰려와 으르렁거린다는 느낌이다. 오늘 동행 길만은 참으라고 살살 구슬려야 할 판이다.

동행한 강주영 화백의 말이 가관이다. "어떻게 저만 오면 날씨가 이래요?" 공교롭게도 동행 길을 떠날 때마다 날씨와 강 화백은 궁합이 맞지 않았다. 처음 칠곡에 갔을 때는 폭설 탓에 도로 위에서 2시간을 벌벌 기다가 결국 취재를 포기했고, 경산에 갔을 때엔 안개비가 내리더니 급기야 산 정상에 가득 낀 구름 탓에 제대로 된 경치도 맛보지 못했다. '제 말이 그 말'이라며 맞장구를 치고 싶지만 날씨를 탓해야지 애꿎은 사람에게 눈을 흘길 일이 아니다. 오히려 눈비에도 아랑곳없이 동행해 준 작가에게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기라도 한 듯 청도군 화양읍 남산골 계곡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먹구름은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적당히 햇살은 가려줬고, 땀방울이 흘러내릴라치면 곧 서늘한 골바람까지 불어줬다. 오늘 출발지는 화양읍에 있는 보물 제323호 '청도 석빙고'. 축조 기록은 조선 숙종 39년(1713년) 2월이지만 신라 초기 때부터 있었다고 전해진다. 전국에 남아있는 6기의 석빙고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길이만 14.5m에 이르는 초대형 냉장고다. 화강암을 지하에서 아치모양으로 쌓아올려 천장 뼈대를 만들고, 그 위에 판석을 덮었다고 한다. 지금은 바닥 석실과 아치 모양만 남아있다. 화석으로만 남은 거대한 공룡의 갈비뼈를 연상케 한다.

석빙고 아래쪽에는 야생화 공원과 산책로 조성이 한창이다. 청도군은 여기서부터 청도 남산 계곡을 따라 신둔사 근처까지 3km 구간을 정비할 계획이다. 이른바 '남산 13곡'을 정비하는 것인데, 9곡이나 12곡은 익히 들어봤어도 13곡은 왠지 귀에 낯설다. 13곡이 맞는지에 대한 논란도 있기 때문에 그저 남산계곡으로 부르는 게 좋겠다. 아무튼 맨 아래 청수대(靑水臺)부터 계곡은 시작된다.

행여 계곡을 오르다가 이곳이 청도 땅임을 잊을까봐 걱정됐는지 손바닥만한 땅만 보이면 감과 복숭아를 심어놓았다. 얼마전까지 연노란 빛이던 감잎은 짙은 녹색으로 바뀌었고, 엄지손가락 끝마디만한 복숭아가 솜털이 수북이 덮인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여름을 지나 가을로 접어들 때쯤, 계곡은 풍성한 모습을 바뀔 터이다. 행여 이곳을 찾는 이방인들이 호기심을 핑계삼아 감이며 복숭아를 함부로 따지는 않을지 걱정스럽다. 어제까지 내린 비로 계곡물이 넘쳐난다. 제법 깊은 바닥까지 훤히 보일 정도로 맑은 물이다.

남산계곡을 오르는 길은 속된 말로 하자면 옛 사람들이 남긴 '낙서'를 찾는 길이다. 크다 싶은 바위만 나오면 거기에 글을 새겨놓았다. '낙서'라고 표현했지만 그 속에 담긴 정취는 흐뭇한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처음 만나는 '청수대'는 절벽에서 맑은 물이 떨어지는 작은 폭포다. 그 아래 웅덩이를 '여기추'(女妓湫)라고 하는데 기생들이 즐겨 찾아와 목욕하던 못이라는 뜻이다. 조금 더 위쪽에 '녹수문'(鹿脩門)이 있다. 예전 사냥꾼들이 사냥을 시작하기 전 수렵제를 지낸 곳으로 추정된다. 물을 마시는 용의 모습을 닮은 웅덩이라고 해서 '음룡지'(飮龍池)도 있고, 흰 돌이 펼쳐진 여울이라는 뜻의 '백석뢰'(白石瀨)도 만날 수 있다. 더 위로 올라가면 '취암'(醉巖)이 나온다. 술에 취했는지 경치에 취했는지 알 수 없다. 글이 새겨진 바위에는 '도광(道光) 18년 무술(戊戌)'이라 적혀있는데 이는 조선 헌종 4년(1838년)에 해당된다. 근처 바위에 무려 11수의 한시가 새겨져 있다. 모두 '성'(聲)과 '정'(情)을 운자로 해서 지은 시들이다.

그 중 도필락의 시는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 '시냇가 돌 위에 취한 채 누워 / 흘러가는 물소리 꿈결에 듣네 / 흩어지는 물보라 꽃잎이 떠서가니 / 솟았다 잠기는 것 세상 정일세'(번역 능인고 전일주). 이곳을 찾은 선비 문인들이 세상사 번뇌를 잊고 술 한 잔 기울이며 풍류를 읊던 모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아마 이런 풍류의 절정은 다시 위쪽에 있는 '산수정'(山水亭)에서 이뤄지지 않았을까. 지금은 풀밭이 가득한 제법 너른 터에 정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계곡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글귀는 물줄기를 따라 한참을 이어진다.

하지만 멋에 취해, 술에 취해 놀더라도 나름의 절제는 있었던 듯 하다. 관세음보살이 머무는 곳을 나타내는 '금사계'(金沙界)라는 글귀는 더 이상 세속의 유람객이 올라오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금사계 맞은 편 높은 바위에는 '자시유인불상래'(自是遊人不上來)라고 새겨놓았다. 주자가 지은 '무이구곡가' 중 제8곡의 마지막 시구를 빌려온 말이다. 길 안내를 맡은 청도군청 임형수씨는 "여기서부터 놀러오는 사람은 올라오지 말라는 뜻"이라며 "옛날 사찰 경내까지 속인들이 찾아와 소란피우는 것을 경계해 적어놓은 글귀"라고 했다.

경치에 취하고 흥에 취해서 그런 것일까. 계곡 위쪽에 지금은 폐허처럼 남은 식당이 있다. 곳곳에 콘크리트로 도배를 해놓고, 터만 보이면 평상을 깔아놓았으니 자연의 멋스러움은 홀연히 사라지고 말았다. 예전 관선 군수 시절에 저질러진 폐해가 아직까지 바로잡히지 못하고 남아있는 것이다. 안타까움에 혀를 찰 뿐이다. 옛사람들이 이를 봤다면 기겁을 하고 뒤로 나자빠질 노릇이다.

출발지에서 신둔사에 이르는 길은 꾸준한 오르막이다. 하지만 물소리를 벗삼아 허위허위 오르다보면 숨가쁠 겨를도 없다. 행여 빠뜨릴 새라 하나 더 보태자면, 앞서 출발지인 석빙고 인근의 유적도 놓쳐서는 안 된다. 최근 새롭게 복원한 청도읍성이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고, 청도 향교와 동헌, 그리고 조선시대 객사로 쓰이던 도주관을 만날 수 있다. 도주(道州)는 고려시대 청도의 다른 이름이다. 아직 화양읍 유적들은 덜 알려진 덕분에 사람의 발길도 덜 탄다. 가족들과 함께 나들이하기에 더 이상 안성맞춤도 없다.

글·사진=김수용기자 ksy@msnet.co.kr

도움말=청도군청 문화관광과 임형수 054)370-2063

전시장소 협찬=대백프라자 갤러리

※ 강주영 작-남산계곡

열대우림 속에 들어온 듯한 착각이 든다. 나뭇잎은 기지개라도 켜듯 돌아서면 한 뼘이나 자라있고, 계곡물은 눈 닿는 곳마다 폭포처럼 콸콸 흘러내렸다. 인간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 갈수록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남산계곡은 인간의 발자취가 자연을 난잡스레 흐트러놓지 않는 선에서 조화를 이루었다. 강주영 화백은 유난히 이번 동행길에 대한 인상이 깊었나보다. 워낙에 강한 붓터치와 색감으로 자연을 표현하는 작가이기도 하지만 이번 그림에서 그의 그림은 역동성이 넘친다. 강 화백은 "전날 밤샘 그림 작업을 한 탓에 처음 길을 나설 때엔 무척 힘들었지만 막상 계곡을 오르고나니 모든 피곤이 싹 사라진 느낌"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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