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3040 광장] 디지털은 문화다.

아주 오래전, 시베리아 지방의 한 소녀가 자신을 버리고 떠난 이에게 그림으로 편지를 썼다고 한다.

"당신과 헤어진 봄이 지나 벌써 가을입니다 / 당신이 나를 떠난 지금도 난 여전히 당신이 그립습니다. / 나를 떠나 새로운 사람과 지내는 시간이 어떤가요? (중략) 모든 걸 잊고 새로운 사람과 시작하려고도 생각했습니다. / 하지만 당신이 돌아온다면 기다리겠습니다. / 부디 당신의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에 나에게로 돌아와 주세요." 후세 사람들은 이렇게 풀이하지만 당시 편지를 받은 당사자도 같은 의미로 해석했는지, 소녀의 애절한 심정을 구구절절 제대로 헤아렸는지는 짐작하기 어렵다. '문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한국의 어느 봄날, 선남선녀가 기차에서 만나 동석을 하게 되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남자가 조심스레 말을 건넸고 대화가 계속되면서 차츰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 사이 기차는 목적지에 다다랐고 두 남녀는 아쉬운 마음에 급히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 그런데 약속 장소를 서로 다르게 이해했던 이들은 같은 날 다른 곳에서 하염없이 서로를 기다리다 쓸쓸히 자리를 뜨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만나지 못했다. '휴대폰이 없었기 때문이다.'

2003년 서울, 러시아에서 온 아리따운 아가씨가 어느 박람회장에서 한국의 멋진 청년을 만났다. 얼마 후 아가씨는 모스크바로 돌아갔지만 두 사람은 언제라도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었고 때론 얼굴을 마주한 채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었다. '인터넷이 있었기 때문이다'. 컴퓨터와 휴대폰은 수만리 떨어진 공간을 하나로 이어주었고 이태 뒤 이들은 성스럽고 아름다운 결혼식을 올렸다.

2010년 현재, 우리는 디지털 세상을 살고 있다. 짧은 시간, 디지털 문명은 산업과 경제의 패러다임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의 틀마저 바꾸어 놓았다. 이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나면 연락할 방법이 없어서, 또는 멀리 있는 이에게 마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해 일어나는 안타까운 사연들은 잘 찾아보기 어렵다.

디지털문명이 열어가는 세상이 이전과는 워낙 다르다 보니 어떤 이는 인류역사를 디지털 시대와 아날로그 시대로 구분 짓기도 한다. 물론, 반대의 목소리도 있다. 어떻게 기계문명을 일으킨 산업혁명의 의미가 퇴색될 수 있으며 선사시대와 역사시대의 차이를 무시할 수 있느냐고 한다. 하지만 이런 논쟁은 텍스트 상의 공론(空論) 같아 보인다.

디지털 문명에 대해 관념적으로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든, 너무 빨리 몰려오는 디지털 기기들이 아직은 낯설고 거북하든, 중요한 건 디지털은 이미 대세일 뿐만 아니라 삶과 결합된 실체적 요소가 되었다는 점이다.

보통사람들에게 배움의 대상이었던 컴퓨터는 인터넷의 등장으로 주식을 하거나 쇼핑을 하는 사용의 대상이 되었고 휴대폰은 더 이상 특별한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며 TV를 비롯한 디지털 가전제품들은 일상을 꾸려가는 생활용품이 된 지 오래다.

그리고 다시, 디지털은 인간의 상상력과 만나 단순한 사용의 대상을 넘어 모두가 함께 누리는 완전히 새롭고 특별한 가치를 창조하고 있다. 3D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는 애플의 창시자 스티브 잡스(Stive Jobs)와 존 래스터(John Lasseter) 감독의 열정과 상상력이 디지털을 만나 탄생했고 소셜 네트워크서비스(SNS)는 스마트폰이라는 날개를 달면서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소통의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배움의 대상에서 사용의 대상으로 진화한 디지털이 마침내 개개인들이 스스로, 그리고 함께 만들어가는 디지털 문화의 시대를 열어젖힌 셈이다.

최근 들어 애플의 성공을 바라보는 우리 지역의 눈들이 산업적 관점이나 일자리 창출의 방법찾기에만 머물러 있는 듯해 아쉽다. 그리고 디지털이 문화가 된 시대에, 여전히 행정관서의 IT관련 부서와 문화산업과는 멀리 떨어져 있고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문화예술과와 문화산업과는 늘 붙어 있다.

권은태 시나리오 작가·마루커뮤니케이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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