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직전에 둔 상태에서 배우자와 자식 중 누구를 더 믿을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을 받으면 머리를 쥐어뜯는 고민이 생긴다. 어느 쪽이든 선뜻 대답이 나오는 사람은 인생을 잘 살고 있거나 아니면 아직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사람일 확률이 높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꺼림칙한 부분은 있다.
일전에 금융기관에서 일어난 일이다. 나는 지금까지 월납으로 된 저축을 해 본적이 없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노후가 슬슬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저축을 하나 들까싶어 창구여직원에게 상품 문의를 했다. 설명을 듣고 가장 적은 금액의 보장성 저축을 한 계좌 들었다.
몇 가지 가입절차를 거치고 난 뒤 직원이 물었다. 만일에 불미스런 사태가 생겼을 때에 상속자를 누굴 하시겠냐며 법정 상속자 그대로 하실거냐고 묻는다. 그래서 나는 두말 안하고 그렇게 하라고 했다. 아직 젊으니까 죽을 염려 같은 것은 미리 당겨서 할 필요가 없고 설사 죽는다 해도 그건 내가 여기 없을 때 문제니 남은 사람이 알아서 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여직원이 다시 묻는다.
"법정 상속자는 남편입니다. 괜찮으시겠어요? 요즘은 자녀를…."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머리를 확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그 찰나, 나는 상당한 번민이 시작되었다. 남편을 믿을 수 있을 것인가. 아이들의 장래를 끝까지 지켜줄 것인가. 믿음이 가지 않는다. 반대로 자식들은 믿을 수 있나. 아내를 잃고 실의에 빠져있을 불쌍한 남자에게, 아버지 대우를 얼마나 잘해 줄까. 역시 믿음이 가지 않는다.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딸을 상속자로 만들었다. 어른과 아이의 저울질에서 남편이 밀렸다. 또, 같은 여자로서 아들보다는 딸이 이성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뒤, 딸을 불러다 놓고 은밀하게 알렸다. 이러이러한 사연으로 상속자가 되어 있으니 알고 있으라며 통장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딸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아주 기뻐하는 눈치다. 아직 한번, 그것도 아주 적은 금액의 저축 통장이 이렇게 사람을 기쁘게 할 줄 몰랐다. 그날부터 딸은 나를 대하는 모든 태도가 달라졌다. 아프다고 하면 즉각적으로 죽을 끓여오는가 하면 안마도 하고 약도 시간에 맞춰 챙겨준다.
아마도 상속자라는 말은 재산이나 의무의 승계를 받는다는 것보다 믿음을 더 강하게 내포하고 있는지 모른다. 믿음은 어쩌면 사랑보다 우위개념이 될 수도 있다. 통장 몇 개를 더 만들어 아들과 남편에게도 상속자 자리를 하나씩 줘야겠다. 살아있는 동안 확실한 대우를 받으려면 말이다.
주인석(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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