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살핀 오치령 남서쪽 521m봉을 마지막으로 운문분맥 답사를 마친 셈이지만, 밀양강(동창천)과 단장천(동천)을 가르는 분수령으로서의 운문분맥은 거길 지나서도 계속 이어간다. 521m봉~용암봉(龍岩峰·686m)~중산(中山·649m)~꾀꼬리봉(538m)을 거쳐 고속도 밀양 나들목까지 남진하는 게 그 본능선이다.
그 도중의 용암봉과 중산서는 서쪽으로 지릉이 갈라져 나가면서 동창천변 지형 결정을 마무리한다. 용암봉 서릉은 소천봉(小天峰·632m)을 거쳐 '박연정'(博淵亭) 혹은 '마전암'(馬轉岩)으로 맺는다. 중산 서릉은 낙화산(落花山·626m)~보두산(562m)~분항산(盆項山·267m)으로 이어진다.
이런 운문분맥 흐름을 동창천을 거슬러 오르며 살펴보는 게 지금부터 하려는 일이다. 마침 1642년에 씌어진 '유운문산록'(遊雲門山錄)이라는 같은 방향 답사기도 만났다. 370여 년 전 현장 기록인 이 책은 수헌(壽軒) 이중경(李重慶, 1599~1678)이 44살 때 쓴 것이다. 수헌은 청도에 관해 가장 귀한 기록들을 남긴 분이다. 30살 이전에 군수 부탁으로 자료를 모으기 시작해 75살에 완성한 청도읍지 '오산지'(鰲山志)가 대표적이다. 오산지와 유산록은 모두 근래에 완역됐으니, 이 또한 이 시리즈의 인연인가 싶다.
우리의 답사 시점(始點)은 청도와 밀양을 잇는 '상동교' 지점이다. 밀양시 상동면 땅인 거기는 '밀양강'이라는 표지판이 처음 나붙는 곳이다. 운문분맥 쪽 '동창천'과 비슬기맥 쪽 '청도천'이 그 직전 유천서 합친 결과다.
이 일대서 먼저 주목해 둘 대상은 상동교 바로 남쪽 '분항산'이다. 나지막하고 이제는 그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하는 이 드물지만, 그건 밀양·청도·대구로 이어지던 엄중한 봉수(烽燧)의 길목이었다. 그 '분항봉수'서 횃불을 들면 청도 '남산봉수'가 받고 팔조령 '북산봉수'가 이어 대구 수성못 '법이산봉수'로 넘겨줬던 것이다.
수헌이 출발했던 지점은 그 상류 유천(楡川)이다. 거길 지나 동창천 서편 58번 국도로 거슬러 오르자면 강 건너로 밀양 상동면의 매우 큰 골짜기 두 개가 차례로 펼쳐진다. 앞의 것은 소천봉(632m)~용암봉(686m)~백암봉(679m)~중산(649m)~낙화산(626m)~보두산(562m) 능선으로 둘러싸인 도곡리 공간이다. 슬금슬금 구경해 가며 걸어서 약 7시간 걸리는 그 환종주 산길은 조망이 아주 좋고 암릉도 쏠쏠한 인기 등산코스다.
그 능선 중 용암봉서 동창천으로 내려선 산줄기는 매화리를 복판에 두고 소천봉서 둘로 나뉘며, 남쪽 것의 끝에 '박연정', 북쪽 것 끝에 '마전암'이라는 명소가 있다. 둘 다 두 물 머리로 튀어나온 갑지(岬地)인데다 절벽을 갖췄고, 위에는 노송들로 울창하다.
그 중 박연정(博淵亭)은 매우 아름다운 정자이나, 370여 년 전 수헌이 찾았을 때는 심하게 퇴락해 있었다. 안타까워 묻는 말에 주인은 "하나 있던 자식이 일찍 죽었으니 누가 이걸 지키겠는가. 버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라고 한다. 읽는 가슴이 시리다.
박연정에서 수헌은 "드디어 운문동으로 들어서게 됐다"고 선언한다. 앞서 유천을 지나면서는 "이곳이 운문동 바깥 관문이다"고 썼었다. 당시에는 '운문'을 그런 넓은 지구로 인식했던 모양이다.
밀양의 두 번째 골은 소천봉~용암봉~521m봉~종지봉(539m)으로 둘러싸인 신곡리 공간이다. 동네 들머리에 마전암 절벽이 있고 그 아래에 마전연(馬轉淵)이라는 소(沼)가 있다. 상동교서 접근해 갈 때 매화리와의 경계점인 마을 입구 도로 왼편에 솟은 전파 중계탑 아래다. 길은 본래 그 아래 절벽 위로 길이 이어져 있었다고 했다. 여전히 흔적이 잘 유지되고 있는 옛길의 풍치는 지금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을 듯했다.
'馬轉'(마전)이란 이름을 두고 수헌은 "말이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질 위험을 경계해 지은 이름일 것"이라는 정도로 추측했다. 반면 '密州舊誌'(밀주구지, 밀양 옛 기록)에 "신라군에 패한 이서국의 많은 군사와 말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어 그런 이름이 생겼다는 전설이 있다" 하니 더 숙연할 역사의 현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마전암·마전연은 잊혀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동창천 파인 바닥만 가리켜 연원도 모른 채 '말구르소'로 부른다고 했다.
복주머니같이 둥그렇게 형성된 신곡리 골의 마전암 맞은편 끝자락은 '오대'(烏臺)라 불리는 또 다른 갑지 절벽이다. 신곡리 양수장에 인접했고 동창천을 가로지르는 '사천보'에 맞닿아 있으며, 청도-밀양의 시·군 경계능선 답사의 시종점이어서 산행 시그널들이 나붙어 펄럭이는 곳이기도 하다.
44살 때의 답사를 통해 오대에 마음을 뺏긴 수헌은 그 5년 후 아예 거기다 별장을 짓고 67살 때까지 왕래했다. 그가 살던 집의 축대는 소나무 숲 속에 지금도 남아 있고, 그걸 받치는 큰 바위 옆면에는 그 사실을 알리는 한자 글씨가 가로로 새겨져 있다.
오대로 내려서는 산줄기에 의해 밀양 신곡리와 구획된 마을은 청도 매전면 구촌리(龜村里)이나, 그 마을 또한 같은 산줄기의 종지봉 지릉에 의해 매전면 내리(內里)와 나뉘어져 있다.
내리는 종지봉(539m)~521m봉~오치령(435m)~561m봉(산불초소)~고추봉(657m)~육화산(675m)~고깔봉(463m)으로 이어달리는 능선에 의해 동그랗게 둘러싸인 넓은 공간이다. 하지만 마을에서는 그보다 '중남'이란 말이 더 중요한 지명같이 사용되고 있었다. 다리는 '중남교', 교회는 '중남예배당'…인 것이다. 그 중남은 거기 있던 초등학교 이름으로, 일대 7개 마을을 '중남학구'라 부르던 데서 유래해 광역 지명처럼 굳어졌다고 했다. 이채로웠다.
내리 북편으로는 운문분맥의 고추봉서 출발한 뒤 육화산을 거쳐 고깔봉으로 내려서는 육화산 능선이 달린다. 그 산줄기서 가장 유명한 것은 물론 육화산이다. 하나 동창천 건너 국도를 북에서 남으로 달릴 때 일대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양 솟아 보이는 것은 고깔봉이다. 물길 쪽으로 유독 길게 튀어나와 있는 게 이유다.
이 육화산 능선 북편 마을은 장연리(長淵里)다. 그리고 고추봉(657m)~흰덤봉(682m) 사이의 이 동네 구간 운문분맥을 독차지한 것은 장연리 세 자연마을 중 '장수골(長水谷)마을'이다. 육화산 등산로는 물론 청도서 구만산 넘어가는 산길도 이 마을 안으로 이어져 있다. 마을 입구 장연사(長淵寺) 터엔 보물 677호 3층 쌍탑이 섰고, 마을 안 골은 대단한 애암(崖岩·벼랑바위)들로 둘러싸여 들어서면 마치 바위병풍 속의 별천지에 도달한 듯하다.
장연리 지나 동창천을 거슬러 오를 경우 매전면 동화마을(호화2리)에 닿는다. 운문분맥의 흰덤봉서 분기해 애암(崖岩)고개를 지난 뒤 되솟아 남북으로 길게 이어가는 산줄기 서편 마을이다. 동편에는 사곡·애암 등 남양1리 마을들이 자리했다.
만약 강변으로 나가지 않고 장연리서 산속으로 들어가 임도를 타고 애암고개(200m)를 넘으면 바로 사곡마을에 닿는다. 그 아래엔 '애암'이라 부르면서도 '아음'으로 표기하는 마을이 있다. 하지만 청도고 김태호 교사는 근래 '청도문화' 10호를 통해 '애암'이 옳은 이름이라는 판단을 제시했다. 마을 앞 동창천변에 있던 절벽바위가 '애암'이어서 그런 이름이 생겼다는 것이다.
사곡마을서 그 애암마을을 통해 동창천변으로 나가는 대신 마을 안 골로 더 깊이 들어가면 '사곡고개'(220m)를 넘어 남양2리(임실마을)로 연결된다. 밀양으로 이어가는 '인재' 진입점이다.
임실에 인접해서는 억산 아랫마을인 금천면 오봉리(梧鳳里)가 있고, 거기서 '독방고개'를 넘으면 박곡리(珀谷里)다. 박곡은 운문사로 바로 넘어가는 '면탯재' 길목이면서 보물 834호 대비사 대웅전과 보물 203호 석불상을 품은 골 깊은 동네다.
박곡리 석불상은 얼굴 부분이 완전히 망가졌는데도 불구하고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있는 뛰어난 석조물로 정평 나 있다. 1850년 현장을 둘러봤던 송재(松齋) 김상은(金尙殷, 1807~1851)은 자신의 '유운문산록'을 통해 "의젓한 모습의 돌부처가 있는데 얼굴과 눈이 움직일 듯 완연히 사람 모습이다"고 기록해 뒀다. 160년 전까지만 해도 잘 보전되고 있었다는 증언일 것이다.
박곡리로 들어가는 동창천 가 진입점은 신지리(薪旨里)다. 지금은 강 건너 동곡리(東谷里)로 옮겨졌으나 전에는 금천면사무소도 여기 있을 만치 일대의 구심점이었던 곳이다. 그런 과거를 증언하는 게 여럿 남은 고건축들이며, 한 시절 일대 선비사회의 사랑방이었을 물 가 '만화정'(萬和亭)도 그 하나다.
인접해서는 잘 알려진 '선암서원'(仙巖書院)이 있고, 그 건너 어성산(御城山)에는 순국의 혼이 서린 '봉황애'(鳳凰崖) 절벽이 솟았다. 임란 때 그 위에서 싸우던 박경선(朴慶宣) 의병장이 백병전 중 팔이 잘리자 왜병을 안고 함께 아래 물속으로 떨어져 순국했다는 곳이다. 그는 청도 이서면에서 창의한 사촌 이내의 박씨 문중 '14의사(義士)'의 일원이다. 14의사(義士)는 이서면 소재지 동네인 학산리의 보리미 마을 '용강(龍岡)서원'에서 모시며, 선암서원 뒤에는 창의를 기리는 비석이 서 있다.
저렇게 유서 깊은 신지·박곡 동네서는 중요한 이야기를 또 하나 들을 수 있었다. 운문사계곡 '못골'이 신원리 땅이긴 하나 주 이용자는 이 마을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호거능선만 넘으면 바로 닿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거기서 풀 베어 거름하고 나무 베어 땔감 삼았으며 '마루타'(토막나무) 만들어 제재소에 져다 팔아 양식을 샀다고 했다.
신지리 지나 더 오르면 임당리이며, 370여 년 전 수헌은 거길 거쳐 현재 운문호로 변해 있는 구간까지 거슬러 살핀 후 무적천으로 물길을 바꿔 운문사로 향했었다. 이제 그 길을 걸을 수 없게 됐으니 댐 안쪽 풍경은 사진으로나 구경해야 할 형편이다.
글 박종봉 편집위원
사진 정우용 특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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