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근대미술 산책] 김수명 作 '정원'

무질서해 보이는 자연현상에 조형적 질서 부여

작가 : 김수명(1919~1983) 제목 : 정원 재료 : 종이에 수채 크기 : 67.5×87㎝ 연도 : 1939년 소장 : 국립현대미술관
작가 : 김수명(1919~1983) 제목 : 정원 재료 : 종이에 수채 크기 : 67.5×87㎝ 연도 : 1939년 소장 : 국립현대미술관

넓은 자연을 그린 풍경화에서 서사적인 서정성을 느낄 수 있다면 작은 경치는 작가의 내밀하고도 친근한 서정성을 전달하는 것이 특징이다. 집안에 있는 이와 같은 화단은 바깥 멀리가지 않고도 자연의 일부를 감상하며 그 원리를 탐구할 수 있는 곳이다. 이 작품을 보면 대낮의 햇빛을 피한 그늘에서 뜰을 내다보며 수채화 한 폭을 완성하는 화가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뜨거운 볕 아래 봉숭아가 피고 석류가 영그는 광경을 보며 미를 발견할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생장하고 변화하는 우주와 자연의 섭리를 배울 수도 있다.

모네가 수련 연작을 그렸던 지베르니의 정원처럼 매일 똑같은 장소 안에서도 얼마나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것들을 대할 수 있는지 깨닫게 하는 곳이 바로 정원이다. 그래서 많은 화가들이 이 주제를 그려왔는데 그 자체가 재현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조형적 탐구를 위한 모티프가 되기도 했다. 특히 현장을 지속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점에서 자연스럽게 조형적 실험으로 유도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 작품은 당시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 달리 새로운 점이 나타난다. 첫째는 작품의 크기이다. 즉석에서 완성하는 수채화는 풍경화의 경우 대개 작은 소품이었던 반면 이 그림은 꽤 큰 크기인데 야외 제작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화면의 크기는 관객의 시각을 압도하며 충만하게 채운다.

다음은 원근법적 공간묘사와 그래픽적인 평면화가 동시에 시도되고 있어 기법상 일관성을 결여한 과도기적인 표현단계의 실험적인 특징을 보이는 점이다. 두 가지 다른 시각이 혼재해 있는데, 마티스로 대표되는 표현주의의 초기 단계에 나타나는 조형적인 특징과 아직 인상파의 자연주의적인 방법에 의한 대상의 재현이 그것이다. 짧게 끊어 쓰는 단속적인 붓 터치와 빛의 묘사 등에서는 인상주의의 묘사방식이, 근경의 화분과 나무줄기 표현 등에서 보이는 테두리의 윤곽선과 길게 긋는 붓질 자국은 추상화하기 전 단계로서의 양식적인 표현이 적용되었다.

뒤편 장독대와 그 배경에 둘러쳐진 흙 담장의 뛰어난 묘사나 잘된 명암 표현에는 현실의 모방에 충실하려는 재현주의적인 태도가 그 바탕에 있지만 근경에 평면적으로 해석한 화분의 형태나 석류가 매달린 나무를 보면 특히 눈길을 끄는 오른쪽 나무덩굴 잎의 흑백반전 표현법으로 부각된 윤곽처리에서 자유로운 구성 감각을 발휘한 것이 인상적이다. 후기인상파를 지나 마티스에 오면 환영을 추구하던 자연주의적 공간묘사가 태피스트리에 수놓은 아라베스크 무늬처럼 평면화가 일어나듯, 사실적인 재현에 매달리지 않고 객관적인 모방을 넘어 주관적인 조형의지로 전환해가는 모습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식물의 무성함 속에서 성장력과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듯 작가의 화필에서도 참신한 감각과 자유롭고 화려한 구성의 취향을 볼 수 있는 이 작품은 무엇보다 매체에 대한 이해와 표현의 자신감이 증가한데서 결실된 것이다. 뜰의 경치에서 한 장면의 일루전을 넘어 각종 나무와 풀잎들로 화려하게 수놓인 눈부신 아라베스크 무늬의 조형성을 느끼게 한다.

김영동·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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