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일제강점기 때도 '노동 귀족'있었다

아나키스트 주도 '대구노동회' 초기 권익보호 앞장 뒤에 변질돼

재판정으로 압송되는 대구노동회 회장 김광서와 간부들.
재판정으로 압송되는 대구노동회 회장 김광서와 간부들.

일제강점기 때에도 '노동 귀족'이 있었다. 1920년대 초반 대구노동회는 신재모, 서동성 등 아나키스트 세력의 주도 아래 대구역 운수 노동자의 친목을 도모하는 계(契)의 형태로 출발했다. 이후 정미소와 자유노동자들이 참여해 조직 규모가 커지면서 대구노동친목회로 전환했다가 다시 대구노동회로 바꿨다. 대구노동회의 급성장은 노동자의 권익 보호와 상호부조가 배경으로 작용했지만 실상은 노동자가 대구노동회에 가입하지 않을 경우 일감을 얻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정미소 노동자와 운반노동자는 어쩔 수 없이 가입해야 했고 회원이 4천여명에 이를 만큼 성장했다.

이 단체의 결성을 주도했던 아나키스트들이 1920년대 중반에 빠지고 이때부터 약 8년 동안 김광서가 회장을 맡으며 활동을 주도했다. 그는 목수·봇짐장사·미곡상 등을 하다가 대구노동회에 관계한 인물로 활동 초기에는 노동자의 권익 향상을 위해 노력, 신망을 얻었다. 노동자가 동맹파업을 할 때 자본가가 그를 찾아와 사죄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영향력을 이용, 절대 군주로 군림하면서 노동운동의 대의를 저버리고 온갖 비행을 저질렀다. 그는 간부와 함께 회계장부를 조작해 노동자 회비로 마련된 거액의 공금을 횡령했고 그 결과 그는 저택을 소유, 일약 대지주가 됐다. 정계로 진출하기 위해 대구부윤을 지낸 일본인을 고문으로 기용, 자본가·일제 관리들과 유착 관계도 맺었다.

또 자신의 명성을 과신한 나머지 1929년 원산 총파업이 일어났을 때 중재 명목으로 원산으로 갔지만 파업을 주도하던 원산노동연합회 위원장 김경식으로부터 '자본가의 주구'이자 '친일파'라고 비난받는 수모를 당했다. 김광서는 폭행과 협박 혐의로 그를 고소해 김경식은 일제 경찰에 체포됐고 원산 총파업은 큰 타격을 입어 결국 와해되고 말았다. 김광서는 자본가의 사주를 받아 어용 노동단체를 조직, 파업을 분열·와해시키는 활동도 서슴지 않았다.

결국 그는 공금 횡령 사실이 드러나 구속됐고 재판 과정에서 파렴치한 행각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1심보다 항소심에서 더 높은 형을 선고받고 수감됐다. 그가 구속된 후 대구노동회는 사실상 와해되었고 자본가들은 이 틈을 타 노동조건을 개악해 노동자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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