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동행-경북을 걷다] <26> 영천 인종태실

윤종대 작-태실 가는 길
윤종대 작-태실 가는 길
복원 전만 해도 태실 주변은 파헤쳐졌고, 석물은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복원 전만 해도 태실 주변은 파헤쳐졌고, 석물은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은해사 암자인 백흥암 극락전에 있는 수미단. 일반인 출입이 엄격히 제한된 곳이지만 사찰 측의 배려로 보물 제486호 수미단의 아름다운 조각을 사진에 담을 수 있었다.
은해사 암자인 백흥암 극락전에 있는 수미단. 일반인 출입이 엄격히 제한된 곳이지만 사찰 측의 배려로 보물 제486호 수미단의 아름다운 조각을 사진에 담을 수 있었다.
인종태실 안내를 맡은 영천시청 김병찬씨가 1999년 발굴 조사 이후 복원까지 이르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인종태실 안내를 맡은 영천시청 김병찬씨가 1999년 발굴 조사 이후 복원까지 이르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영천시 청통면 은해사에서 첫걸음을 뗐다. 그저 스쳐지날 수도 있지만 오늘 가는 '인종 태실' 이야기를 하자면 은해사를 빼놓을 수 없다. 사학자인 최완수 선생이 쓴 '명찰순례' 2권에는 은해사 이야기가 나온다. 큰 제목에 '추사(秋史) 친필 현판의 보고'라고 돼 있고, 작은 제목에는 은해사를 '인종 태실 수호 사찰'이라고 적혀 있다. 이에 얽힌 이야기만 풀자고 해도 책 한 권이 부족할 지경이다.

역사 공부를 하자고 들면 한도 끝도 없을 터. 간추리고 간추려 줄기만 잡아보자. 은해사에서 2km쯤 올라가면 태실봉, 즉 인종의 태(胎 ; 탯줄)를 묻어놓은 봉우리가 나온다. 은해사 창건이 조선 중종 15년(1520년)이고, 아들인 인종이 왕세자로 책봉된 것도 같은 해이다. 원래 태실을 지키던 수호사찰은 당시 백지사(栢旨寺)로 불리던 현 백흥암이었다.

최완수 선생은 책에서 '(숭유억불 정책의) 가혹한 박해 속에서 왕실과의 어떤 관계라도 빌미삼아 대찰 창건을 도모하려던 불교계에서는 백지사를 수호사찰로 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새 절의 창건을 서둘러서 은해사를 새로 지었던 것 같다'고 적고 있다.

오늘 가려는 태실봉과 은해사, 그리고 백흥암의 관계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은해사 앞을 지나 1km쯤 가면 신일지라는 저수지가 나온다. 농업용수를 대기 위해 새로 만든 저수지로, 과거 태실을 조성할 당시만 해도 이곳은 계곡이었다. 신일지를 옆에 두고 산쪽을 바라보면 갈림길이 나온다. 오른쪽은 운부암으로 가는 길이고, 왼쪽은 백흥암으로 가는 길이다. 길 사이에 야트막한 산봉우리가 솟아있는데, 바로 태실봉이다. 이곳에 인종 태실이 있음을 알리는 표지판이 조금 가파른 등산로 입구에 쓸쓸하게 서 있다.

태실봉 좌우로 계곡이 흐르고, 물줄기 옆으로 다시 산들이 첩첩이 에워쌓으니 산세는 마치 여인의 음부와 같은 형상이다. 달리 해석하자면, 좌우로 물이 흐르고 산세가 드높은 가운데 봉우리가 솟아 있으니 마치 용이 평야를 향해 머리를 들이민 형국이다. 길 안내를 맡은 영천시청 문화재담당 김병찬씨는 "지금은 숲이 우거져 산세를 짐작키 어렵지만 위성사진을 보면 이곳에 태실이 조성될 수밖에 없었던 기막힌 산세를 한눈에 볼 수 있다"며 "태실은 봉우리 정상에 마치 화룡점정처럼 자리하고 있다"고 했다.

태실로 오르기 전 먼저 오른편 길을 택해 운부암으로 향했다. 신라 성덕왕 10년(711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알려진 유서깊은 사찰이다. 절을 세울 당시 상서로운 구름이 일었다해서 운부암(雲浮庵)으로 이름 지어졌다. 백과사전에는 '조계종의 선맥을 이어온 운부암은 예로부터 고승대덕들과 선지식(善知識)들이 두루 거쳐간 수행처로 유명하다. 한국 근현대 불교를 개창했던 경허 스님을 비롯하여 조계종 종정을 역임한 동산 스님, 운봉 스님, 성철 스님 등이 운부암에서 수도했다'고 나와있다. 운부암은 한마디로 아름다운 절이다. 절 아래 연못에는 구름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연못 건너 편에서 바라본 절은 마치 구름 위에 둥둥 떠 있는 착각을 일으킨다.

운부암에서 내려와 다시 태실봉 입구로 가던 중에 오른쪽으로 길이 하나 보인다. 쇠사슬로 길을 막아놓았지만 사람은 다닐 수 있다. '해안평'으로 가는 길이다. 과거 은해사가 창건되기 전에 해안사라는 큰 절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산 속에 내려앉은 다소 경사진 들판은 평범한 사람의 눈으로 봐도 심상찮은 풍수를 지녔다. 영천시청 이원조씨는 "한겨울에 이곳에 오면 바람 하나 없이 포근하고, 여름에 오면 서늘한 기운이 느껴질 정도"라며 "지금은 집터와 절터도 사라지고 사람이 사는 민가 2채만 남아있다"고 했다.

태실봉으로 오르는 길은 가파르다. 20여분만 오르면 되지만 땀에 흠뻑 젖을 정도로 다소 힘든 길이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정상에 오르자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350호로 지정된 '인종 태실'이 반갑게 맞아준다. 지금은 깔끔하게 정비됐지만 10여년 전만 해도 이곳은 폐허나 다름없었다. 1928년 일제는 전국에 흩어진 태실의 관리가 어렵다는 명목으로 태실을 마구 파헤친 뒤 태항아리와 지석 등을 경기도 서삼릉으로 옮겨버렸다. 김병찬씨는 "1999년 처음 발굴조사를 위해 이곳을 찾았을 때 태실을 지키는 거북은 비뚤어져 있고, 석물은 곳곳에 흩어지고 부서져 있었다"며 "발굴조사 후 2007년에 이르러서 가까스로 원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고 했다.

복원된 태실 뒤편에 옛 석물이 놓여있다. 흙속에 묻혀서 80년가량 방치되다 보니 훼손 정도가 심해 다시 쓸 수 없었기 때문. 얼핏 스쳐지나가기 쉽지만 이곳 태실은 꼼꼼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약 500년 전 조성된 태실의 석물은 그 정교함이 놀라울 따름이다. 비록 오랜 비바람속에 깎이고 뭉툭해졌지만 거북이의 상세한 묘사는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원래 조성될 당시의 석물과 후대에 보수하면서 쓰인 석물, 최근 복원하며 쓰인 석물의 색과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 김병찬씨는 "최대한 원형대로 복원하기 위해 전국의 태실과 서삼릉까지 수차례 다녔다"며 "복원 때 사용한 석물은 경주 남산에 있는 화강암을 가져와 깎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태실봉 뒤편 오솔길을 따라 백흥암으로 향했다. 능선 한가운데 사방으로 난 교차로를 만났다. 백흥암 비구니 승려들만 다니는 오솔길은 철조망으로 막아놓았다. 행여 등산객들이 모르고 내려설까 염려해서다. 백흥암도 천년이 넘는 고찰이다. 비구니 승려들이 수행하는 곳이어서 일반인 출입은 엄격히 제한된다. 다행히 사찰 측의 배려로 경내를 둘러볼 수 있었다. 행여 말소리라도 크게 날까 조심하며 극락전으로 향했다. 백흥암은 극락전에 있는 보물 제486호 수미단으로 유명한 곳. 평소에는 들어가볼 수도 없는 이곳에서 아미타삼존불을 받치고 있는 수미단을 만났다. 면마다 봉황과 공작·학·코끼리·용·사슴 등이 조각되어 있는데 그 섬세함과 아름다움이 말로 다하기 힘들다. 수미단뿐 아니라 극락전 자체가 하나의 보물이다. 시간 가는 것도 잊은 채 극락전의 아름다움에 취해있는데 누군가 어깨를 치며 "이제 가야할 시간"이라고 귓속말을 했다. 꿈속에서 깨어난 듯 백흥암을 나서서 계곡 물소리와 함께 은해사로 다시 내려왔다.

글·사진=김수용기자 ksy@msnet.co.kr

도움말=영천시 관광산업진흥팀 이원조, 문화관광공보과 김병찬 054)330-6345

전시장소 협찬=대백프라자 갤러리

윤종대 작-태실 가는 길

홀로 걷고픈 길이 있다. 그런데 막상 혼자 길을 떠나보면 결코 고요하지 않다. 내 속의 자아가 끊임없이 말을 걸어온다. 자신과 나누는 대화는 속풀이다. 그렇게 속을 내놓다보면 곁에 있던 나무와 풀들이 가끔 끼어든다. 흉을 보기도 한다. '너처럼 그런 고민을 하는 사람이 지금까지 수만명쯤 이 길로 지나갔다'고. 한해살이 풀꽃들도 뭘 안다는 듯이 한마디 거든다. '내년에도 그런 고민하는지 두고보자'고. 태실 가는 길은 고요하고 한적한 길이다. 그래서 흐뭇한 길이다. 윤종대 화백은 기대와 설렘이 가득한 표정으로 이 길을 묘사해냈다. 마치 저 모퉁이를 돌아서면 지금껏 가슴을 짓눌러온 온갖 번뇌가 사라질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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