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엄마, 아무 걱정이 없어

중학생이었던 딸이 어느 금요일 저녁 내게 말했다. 불현듯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엄마, 아무 걱정이 없어!"

"응?"

"아무리 생각해도 걱정이 하나도 없어."

막 중간고사가 끝났고, 학원은 휴강이고, 휴일이 기다리고 있으며 딸은 몇 권의 책을 빌려놓았었다. 아이의 그 말에 내 마음에도 잠시 밝은 불이 켜졌다. 어른들은 이렇게 걱정이 하나도 없는 순간을 잘 가지지 못한다. 감당키 힘든 큰 걱정 속에 있을 때는 그것만 해결되면 정말 행복할 거라고 투덜대지만 그것이 해결되는 순간 또 다른 잔챙이 걱정들이 그 자리로 밀려든다. 다가올지 모르는 새로운 걱정거리에 대비해야 한다며 머리와 어깨에 새로운 근심을 이고 진다. 참 번개처럼 빨리도 이고 진다. 해방과 평화의 순간을 그 자체만으로 완벽하게 즐기는 법을 점점 잊어버리고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운동을 하고 음악을 듣는 와중에도 무수히 많은 상념들이 오간다. 오래 머무는 큰 상념도 있고 휙휙 사라지는 것도 있다. 지난 것이거나 앞으로 올 것이거나 간에 해도 소용이 없는 근심이 대부분이다. 밀려드는 근심 속에서 마음은 쉬지 못한다.

통증의 표준적 정의는, '실제 혹은 잠재적 조직 손상과 관련되거나 그러한 손상적 용어로 묘사되는 불쾌한 감각적, 정서적 경험'이다. 나는 여기서 '잠재적'이라는 말에 밑줄을 긋고 싶다. 우리는 실제의 손상에 당연히 통증을 느끼지만 앞으로 다가올 손상에도 통증을 경험한다. 어쩌면 더 클 수 있다. 마음의 통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다가올 외로움에, 다가올 실망감에, 다가올 상실감에 지레 겁먹고 고통스러워한다. 녹초가 된다. 그러한 것에 바쳐지는 시간이 얼마나 많은가. 이별 그 자체의 고통보다 이별이 오려 할 때의 고통은 겪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딸아이도 곧 일상으로 돌아와 또 다른 걱정들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걱정 없이 완벽하게 행복하고 느긋한 시간을 가졌다는 느낌은 그 아이의 마음을 살찌우고 다음 생활의 에너지가 될 수 있다. 나도 어렸을 때는 온 세상과 내가 하나가 되어 걱정이 없던 시간이 보다 많았을 것이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이렇게 그 아이에게서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보고 배우게 된다.

하지만 딸은 고등학생이 된 이후로 더 이상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슬프게도 나의 어린 스승이 이제, 결국, 근심에 에워싸이게 된 것이다.

추선희<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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