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自軍 중심주의

잘 알려지지 않은 얘기지만 태평양전쟁 전범 도조 히데키는 1941년 10월 총리가 됐으나 해군의 진주만 공격이 실행에 옮겨지기 8일 전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모던타임스 Ⅱ' 폴 존슨)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바로 육군과 해군의 반목 때문이다. 도조는 육군대신으로 있을 때 육군의 전투 계획을 해군에 알리지 않았다. 그는 해군을 믿지 않았고 겁쟁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해군도 '제 팔 제 흔들기'로 대응한 것이다.

이 병폐는 고질적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사쓰마(薩摩)번이 장악한 해군과 조슈(長州)번이 주축이 된 육군에는 막부시대부터 있어온 두 번 간의 라이벌 의식이 온존해 있었다. 이는 종종 서로를 경멸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연합함대 마지막 사령장관 도요타 소에무(豊田副武) 제독이 육군을 '말똥'이라고 비하하며 "딸을 육군에 시집보내느니 차라리 거지에게 주겠다"고 한 것은 대표적인 예다. 육군과 해군은 전쟁 기간 내내 사사건건 대립했다. 해군이 전투기 '제로센'을, 육군은 '하야부사'라는 별도의 기종을 운용했다. 전쟁 말기에는 육군이 독자적으로 항공모함과 잠수함을 건조하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일본 해군 최대의 적은 일본 육군'이란 말이 끊이지 않았던 것은 이런 소모적 대립 때문이었다.

정보 수집이나 전략 수립에서도 제각각이었다. 육군과 해군은 각각 대사관 소속 무관을 통해 별도의 해외 정보망을 구축했다. 전략도 육군은 대륙진출론, 해군은 자원 확보를 위한 남방진출론으로 갈렸다. 그러니 전쟁을 어떻게 이끌어갈지에 대한 '그랜드 플랜'은 부재할 수밖에 없었다. 있었던 것이라고는 초반에 승기를 잡은 뒤 어떤 단계가 되면 미국이나 영국과 강화협상을 벌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적 가정뿐이었다. 미국과의 생산력 격차에 이어 이런 측면에서도 일본의 패배는 당연했다.

천안함 침몰을 계기로 우리 군에도 주도권 다툼이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합동참모본부 내 합동작전과, 해상작전과, 공중작전과가 각각 육'해'공군만으로 채워져 배타적이고 알력 다툼도 빈번하다고 한다. 또 3군 모두 자군 중심주의에 함몰돼 현대전의 승패를 좌우하는 타군과의 합동작전에 대한 이해도도 낮다는 진단도 나온다. '당나라 군대'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면 철저한 구조 개혁이 필요할 것 같다.

정경훈 논설위원 jghun31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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