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근대미술] 김수명 作 '오후거리'

정서적 표현이 두드러진 암울한 시대의 풍경

작가 : 김수명(1919~1983) 제목 : 오후의 거리 재료 : 종이에 수채 크기 : 29×38㎝ 연도 : 1939년 소장 : 대구문화예술회관
작가 : 김수명(1919~1983) 제목 : 오후의 거리 재료 : 종이에 수채 크기 : 29×38㎝ 연도 : 1939년 소장 : 대구문화예술회관

서양화의 매력 중 하나는 빛의 묘사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풍경화에서 광선의 재현은 핵심적이다. 빛의 양에 따른 미묘한 변화를 기록해나간 모네나 다른 인상파 화가들의 화면에서처럼 그것은 시각적 인상을 결정지을 뿐 아니라 기분이나 감정, 분위기의 특징을 좌우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17세기 네덜란드 회화들에서 빛이 없는 시간대나 더욱이 달밤과 같은 주제의 그림들을 보면 화면의 어둑한 명암 탓에 감각적인 채색이나 필치를 찾아보기 힘들게 한다. 다만 어스름한 달밤의 정취를 고조시키기 위해, 고된 일과 후에 처진 어깨로 돌아가는 늦은 귀가 길의 발걸음을 비춰주는 희미한 빛 밖에는 강조될 것이 별로 없다. 길 위에 패인 물웅덩이에 비친 달빛 같은 데서 심금을 울리지만 이것은 회화적인 표현에서이기 보다 문학적인 요인에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양을 배경으로 한 김수명의 이 작은 그림은 매우 서정적인 감정을 일으키는 풍경화다. 몇 가지 표현주의적이라고 할 만한 요소들이 있는데, 수채화에서 잘 취급하지 않는 무채색을 과감하게 사용하며 특히 투명 수채화에서는 실패를 가져올 수도 있는 치명적인 어두운 색을 도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채색의 발랄함이나 활기를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저녁나절의 검게 변한 산 빛과 언덕아래 마을의 거리 풍광을 오후의 엷은 빛으로 잘 묘사하고 있다.

해거름에 길게 뻗은 그림자들과 그림 가운데서 가장자리 끝까지 비딱하게 기울어져 화면을 크게 양분하는 전봇대가 시각적으로 매우 강조된 인상을 준다. 붓질도 그의 다른 그림들에 비해 거칠어 보여 마치 심경의 변화를 드러내려 한 듯하다. 안정된 구도를 거스르고 고의로 흐트러진 필획들에 의해 원인 모를 감정의 동요를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저녁의 한적한 분위기에 휩싸인 눈앞의 경치에 의해 매개된 솔직한 정서인 것 같다.

그의 대부분 풍경화에서 감정의 두드러진 표현은 없었고, 변덕스러운 일시적인 감정보다 그 시대의 집단적인 경험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를 전달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이 그림에서는 개인의 심적 상태를 드러내는 표현주의적인 인상을 받게 된다. 인상파 이후의 많은 그림을 생각해봐도 새벽이나 일몰의 박명을 그릴 때는 아무래도 대상 자체의 재현에 몰입하기보다 거기에 투사한 자기감정의 표출에 이끌리기가 더 쉬운지 모른다.

작품의 우측 하단에 제작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서명이 있다. 1939년 5월이면 그가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첫 직장으로 부임해온 타향에서 막 교직을 시작할 무렵이다. 개인사적으로는 새로운 희망으로 긴장과 설렘에 차 있을 때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시대적으로 일제의 군국주의가 더욱 전쟁 상황으로 치달으며 모든 생활을 통제와 억압으로 옥죄어갈 때다. 개인과 시대의 행복과 불운이 교차하던 시기, 어두운 그림자가 더욱 짙고 길게 드리워지는 석양에 쓰러져가는 전봇대를 뒤로하고 골목 끝을 향해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혹은 빠져나가는) 한 사람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

김영동 미술평론가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