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옛 시조 들여다보기] 청산리 벽계수야

청산리 벽계수야

황진이

청산리(靑山裡) 벽계수(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시조의 대명사처럼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청구영언』을 비롯한 여러 가집에 수록되어 있다. 작가가 『청구영언』 육당본에는 허강(許 木+畺), 『삼가악부』(三家樂府)엔 서익(徐益)으로 표기된 경우도 있지만 황진이의 작품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신위의 『소악부』(小樂府)에 다음과 같이 한역되어 전하기도 한다.(靑山影裡碧溪水 爾東流爾莫誇 一到滄江難再見 且留明月影婆娑)

한자어를 풀어 보면 "푸른 산 속을 흐르는 골짜기 물이여 빨리 흘러간다고 자랑하지 마라/ 한 번 넓은 바다에 도달하게 되면 다시 돌아오기 어려우니 / 밝은 달이 빈산에 가득히 비치고 있는 이 밤 잠시 쉬어가면 어떻겠느냐"로 풀린다. 글자의 뜻대로 읽으면 그냥 자연을 노래한 작품으로 보이지만 이 작품에는 다음과 같은 배경이 있다.

조선 종실(宗室)에 벽계수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자기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황진이를 만나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늘 큰소리를 쳤다. 이 말을 들은 황진이가 사람을 시켜 달 밝은 가을 밤, 그를 개성의 명소인 만월대로 오게 하여, 낭랑한 목소리로 이 시조를 읊어 유혹하니, 이 노래를 들은 벽계수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이에 도취되어 타고 온 나귀에서 떨어져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전한다.

벽계수라는 종친의 이름과 자기의 기명인 명월을 빗대어 중의법으로 작품을 썼는데 그 재치가 그야말로 보통이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청산을 영원자로 벽계를 순간자로 쉬지 않고 흘러가는 인생에 비유한 것이다. 황진이는 그의 미모만으로 남성을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멋으로 유혹했다. 그런 점에서 스스로 말했듯이 송도삼절임을 부정할 수 없겠다. 여인의 미모 앞에서는 넘어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던, 벽계수도 시조를 읊는 황진이의 멋에는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나 보다.

황진이가 이런 시조를 읊어서 유혹하는데도 아무런 동요를 느끼지 않았다면 멋이 없는 선비다. 조선의 선비가 이 정도의 풍류 없이 어찌 선비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나귀에서 떨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더 큰 사고를 냈어야 황진이를 상대할 수 있는 선비가 아닐까 싶다.

문무학( 시조시인, 대구예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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