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행복을 요리하는 의사] 용서의 딴 이름, 사랑

독일의 한 공항에서는 일 년에 한 번씩 분실하고 찾아가지 않는 여행 가방을 열어보는 행사를 한다. 구깃구깃 넣은 때 묻은 속옷이 나오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줄 선물꾸러미도 나온다. 물건이 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환호성을 올린다.

소설가 박완서 씨는 저서 '여행이야기'에서 "영혼의 여행 가방이 밝음 앞에 드러나는 순간이 두렵다"고 했다. 삶의 끝자락이 머무는 평온관은 어쩌면 그 영혼의 가방을 열어 보는 곳이다.

머리를 빡빡 밀고 입원하신 75세 된 송원식(가명) 할아버지는 고함만 지르셨다. 폐에서 머리로 전이된 암을 방사선 치료하기 위해서 그 전 병원에서 환자 동의 없이 이발을 한 뒤부터 생긴 증상이다. 환자가 너무도 강력하게 거부하여서 방사선 치료는 하지도 못하고 머리만 밀고, 평온관으로 옮겨오셨다. 같이 오신 할머니는 할아버지 걱정을 많이 하면서 초조해 하셨다. 뒤늦게 다급하게 도착한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딸은 암에 걸린 아버지보다는 어머니가 힘들까봐 걱정하면서 상담을 시작했다. 이상했다. 일반적으로 딸은 아버지에 대한 애착이 강한 관계이다. 무슨 갈등이 있는 것일까?

송 할아버지는 40년 전 많은 재산을 가지고 가출했다. 아들과 딸을 두었지만,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 가끔씩 아들과는 연락을 했지만, 할머니와는 거의 40년을 남처럼 지냈다. 할머니는 두 아이를 혼자서 키우셨고, 교회에 열심히 다니셨다. 그 충격으로 말도 약간 어둔하고 더듬거렸지만, 세상의 누구보다도 편안한 모습을 가지셨다. 그렇게 키운 아들이 목사 수업을 받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한 달 전, 갑자기 할아버지가 모든 관계를 청산하고 할머니 집으로 오셨다. 그리고 숨이 차서 대학병원 응급실에 가서 검사하니, 말기 폐암이고 머리까지 전이됐다. 고우신 할머니한테 이런 기가 막힌 사연이 있었다.

송 할아버지에게 방사선 치료의 중요성을 되풀이해서 말씀드리고, 평온관에 입원해 있으면서 대학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게 했다. 할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아들도 미국에서 오게 했다. 할아버지 증상이 좋아졌을 때, 할머니에게 할아버지를 왜 용서해드렸는지 살짝 물었다. "안 보는 정도 사랑인가봐"라고 하시면서 살짝 얼굴을 붉히셨다. 할머니에게 '용서라는 사랑'을 배웠다.

평온관에는 다양한 사연으로 넘쳐난다. 나의 환자는 평온관 입구를 들어 설 때 암 덩어리뿐만 아니라 투병생활을 포함한 인생 전체를 가지고 입원한다. 여러 가지 갈등이 있는 경우 호스피스 팀은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평온관에서 영혼의 가방이 열리는 순간,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 나는 무엇으로 내 영혼의 가방을 채우고 있을까?

김여환 <대구의료원 호스피스…완화의료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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