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100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여성과 관련된 부분만큼 급격하고도 빠른 변화를 찾는 것은 힘들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근대 여성 문제는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여성 문제에서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여성 의식과 이념의 변화였다. 전통 관념과 의식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었던 한국 근대사회 초기 기독교의 전파와 서구 사상의 보급과 수용이라는 커다란 변혁이 있었다. 이러한 변혁의 시기에 여권사상이 보급된 데에는 개화 사상가들과 독립협회 인사들이 그 중심에 있었다.
개화 사상가 등이 서구적 의미에서의 천부인권설을 바탕으로 여성에 대한 불평등과 차별, 무권리 등을 비판한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전통적인 여성관에 비추어 보면 인격적 존재로서의 여성과 여권, 남녀 평등에 대한 주장은 개화 초기 커다란 인식의 전환을 가져 왔다.
한편으론 이러한 의의에도 불구하고 개화 사상가들의 주장은 남성 중심의 계몽주의적 기획이라는 점에서 기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여성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관심은 혼인과 가정을 전제로 하였으며, 여성 자체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여성의 인격과 자유를 인정하고 남성과의 동등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이들의 인식이 진일보한 측면이 있었다고는 하더라도 독립된 개체로서의 여성 인격에 대한 신뢰와는 거리가 있었다.
근대 여성들의 자발적인 의식 각성은 분명 있었다. 대표적으로 찬양회(贊襄會)와 국채보상운동을 들 수 있다. 찬양회는 여성학교 설립을 후원하기 위해 1898년 서울에서 조직된 단체이다. 서울만 한정해서 볼 때 1905년 이후의 여성 교육단체들이 주로 '양반 대관과 주요 유지의 귀부인'들에 의해 조직된 것과는 달리 찬양회의 핵심 인물들은 과부, 서북지방여성, 함경도 출신 러시아 귀화인 등과 같이 주변부의 소외된 소수자들이었다. 또 이 시기 대부분의 여성 교육단체들이 남성 주도하에 조직된 것과는 달리 찬양회는 여성들 스스로의 힘으로 만든 단체였다. 따라서 찬양회의 조직과 활동은 여성의 억압된 삶에 대한 저항 의식과 성 해방에의 열망을 강렬하게 표현한 것이었다.
찬양회의 여성학교 설립은 여성이 학문과 지식으로부터 소외된 존재라는 자각과 아울러 근대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반영했다. 그 영향으로 이른바 애국계몽운동기에 전국 각지에 학교 설립 붐이 일 당시 여성학교도 활발하게 설립됐다. 여성학교 설립운동은 서울보다는 지방에서 보다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이 시기 전국에서 설립된 여학교 수는 174개교에 달했다.
전국적으로 영남이 20개교로 가장 많았다. 특히 대구는 영남 애국계몽운동의 중심지로 교남학회, 광문사 등이 활동했고, 양성(養成)여학교, 달서(達西)여학교, 소남(小南)여학교, 부인야학회, 여자강습소 등이 활발하게 조직됐다.
영남과 대구에서 여성들의 활동상은 국채보상운동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한국 근대사에서 국채보상운동은 항일 독립의식을 집약적으로 표출한 대표적인 운동으로 높이 평가됐다. 주목할 것은 1907년 대구에서 개최된 국채보상 국민대회가 한말 애국계몽운동의 대표 운동으로 발돋움한 배경에는 여성들의 자발적이고 열렬한 참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대구 여성들은 국채보상 국민대회에서 전국의 여성을 향해 분발해 일어날 것을 촉구하는 격문을 발표해 여성의 사회 참여와 주체 의식을 확연히 떨쳤다. 여성들이 국채보상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여성의 권리는 남자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물론 여성의 힘을 세상에 널리 알려 남녀동권을 추구했다. 또 영남과 대구가 국채보상운동을 통해 여성운동의 중심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는 국채보상운동을 한 여성단체의 지역 분포에서 더욱 확연해진다. 영남이 10개 단체로서 전국의 34%를 차지했고, 서울과 경기가 각각 3개와 5개의 단체로 두 지역을 합쳐도 영남보다 적었다. 국채보상운동에서 여성의 역할과 관련해 주목되는 또 다른 사실은 찬양회와 마찬가지로 평민과 하층 여성들, 즉 주류로부터 배제된 여성층이 적극적이었다는 점이다. 근대 사회의 주요 특징 중의 하나가 전통 신분제도의 타파와 개인 평등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여성에 의한 신분제도 타파를 보이는 단적인 사례로 기생들의 역할을 들 수 있다. 1908년 12월 서주원을 회장으로 해 조직된 대구애국부인회의 경우 기생 출신의 염상은이 총무로 고아원 설립, 실업 교육 등 대구애국부인회를 실질적으로 도맡았다. 1920년대 초반 진주에선 여성이 남성과 대면하는 것을 대단히 꺼려했던 분위기에서 기생들이 호열자(콜레라) 예방주사 접종에 직접 참여했고 1932년 1월에는 대구 달성 권번의 기생 124명이 근대적 동맹파업을 일으켜 자치적으로 권번을 설치·운영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국채보상운동에서 나타난 대구 여성의 항일 독립의식은 이후에도 계승됐다. 1909년 말 대구의 교육가 서춘화가 조직한 또 다른 대구애국부인회는 미신과 구습 타파 등 부인계몽운동단체로 1910년 초까지 활동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과 1930년 1월 부산 조선방직 파업 등이 일어나서 일제의 차별과 착취에 항의하는 운동이 전개됐다.
1930년 1월 중순 대구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는 일제히 맹약서 작성과 격문 살포, 성명서 낭독 등 만세 시위로 일제에 항거했다. 이 시위는 몇 달 후인 3월 20일 대구여자고등보통학교의 졸업식에서 격문을 살포하려는 시도로 이어졌으며 2년 후인 1932년 1월에도 일제는 치안 유지를 내세워 3, 4명의 대구여고보 학생을 검거했다.
일제의 심한 감시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지속적으로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한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가하였던 것이다.
김경일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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