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책꽂이를 둘러보니 빛바랜 책 몇 권이 눈에 띈다. 루소의 '고백록'과 모르와의 인생론이 보이고 사르트르의 '구토'는 투명비닐 표지가 누렇게 변색되었다. 본문이 세로로 쓰인 이 오래된 책들은 학창 시절 헌책방 골목을 누비며 사 모은 것들이다. 삐걱거리는 소리 들리는 나무계단을 올라 먼지꽃 핀 다락 구석진 곳에서 마음에 쏙 드는 책을 찾았을 때의 기쁨은 어디에도 비할 수 없다. 그런 날은 남문시장 책방 골목에서 집까지 꽤 먼 거리를 달빛을 등에 지고 걷기도 했었다. 한쪽 표지가 떨어져 나간 성(聖) 고은 에세이를 펼친다. '인간은 슬프려고 태어났다'는 제목이 주는 무거움에 비해 코끝에 와 닿는 냄새가 그윽하다.
나는 부러 책 속에 얼굴을 디밀어 오래도록 그 냄새를 킁킁거리며 맡는다. 찔레꽃 향기 같기도 하고 눈물이 입속에 흘러들 때의 맛처럼 짭짤하기도 한 무엇이 와락 나를 향해 달려든다. 바스러질 듯 붉은빛이 도는 속지에서 허무주의 작가의 삶을 탐색하던 내 젊은 날의 한때를 떠올린다.
책꽂이 맨 아래 서 있기조차 힘들어 아예 누워버린 허술한 책이 몇 있다. 복사기가 없던 시절 밤늦게까지 친구들의 글을 기름종이에 베끼고 등사기로 밀어서 만든 동아리 문집이다. 분량이 많아 몇 명의 친구들이 나누어 가지고 글씨를 썼다. 문집을 넘길 때마다 글자 모양이 달라지는 추억을 더듬는다. 양 갈래 머리를 한 단정한 여학생과 여드름투성이 부끄럼 많던 남학생의 열정이 책갈피마다 배어나는 것 같다. 제동장치가 고장 난 자전거를 타고 그 시절로 마구 달려가고 싶다.
문집 곁에 나란히 함께 누운 사진첩엔 가족들의 단란한 한때가 들어있다. 지금은 다 자라 코 밑에 까만 수염이 돋아나는 아들 녀석과 이젠 제법 숙녀다운 딸아이의 어린 날들이 차곡차곡 쌓여있어 절로 웃음이 난다.
아이들이 자신들 모습은 없다며 투덜대던 우리 부부의 결혼 비디오에 눈길이 간다. 묵은 먼지를 털고 화면을 재생해 본다. 지금은 곁에 없는 아버지가 그 속에선 넉넉하게 웃고 계신다. 문득 테이프를 엄마한테 전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요즘의 아이들은 헌책방을 전전하지 않는다. 치열한 경쟁 속에 놓여있는 요즘 아이들은 헌책방을 둘러보는 낭만을 즐길 수 없는 까닭이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동네 서점이나 온라인 서점에서 필요한 책을 그때그때 구입한다.
하지만 편리함이 추억까지 길어 오진 않는다. 추억할 거리가 없는 삶은 쥐똥나무 꽃핀 울타리를 지날 때도 향기를 모르는 것과 같다.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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