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동행]경북을 걷다<27>청송월외∼금은광이 길

산길, 홀연 나타난 '너구마을'…여기가 신선이 놀던 곳이런가

박종경 작-너구마을 배 부르게 따먹어도 남을 만큼 넉넉한 산딸기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보다. 탐스런 산딸기가 익어가는 오솔길을 지나 굽이 돌아가면 숨겨진 보물처럼 햇살 따스한 너구마을을 만날 수 있다. 산길 내내 산딸기 길은 이어진다. 마치 맷돌처럼 물줄기가 휘어돌아가는 그 곳에 너구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림 속에는 그저 집 한 채뿐이지만 산속마을치곤 제법 너른 동네다. 특유의 상상력을 동원한 풍경을 선보인 박종경 화백은
박종경 작-너구마을 배 부르게 따먹어도 남을 만큼 넉넉한 산딸기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보다. 탐스런 산딸기가 익어가는 오솔길을 지나 굽이 돌아가면 숨겨진 보물처럼 햇살 따스한 너구마을을 만날 수 있다. 산길 내내 산딸기 길은 이어진다. 마치 맷돌처럼 물줄기가 휘어돌아가는 그 곳에 너구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림 속에는 그저 집 한 채뿐이지만 산속마을치곤 제법 너른 동네다. 특유의 상상력을 동원한 풍경을 선보인 박종경 화백은 "산속 깊은 곳에 마치 멍석을 깔아놓은 듯 펼쳐진 마을 풍경이 마음에 쏙 든다"고 연방 탄성을 자아냈다.
새로 놓은 콘크리트 다리 때문에 달기폭포의 아름다운 자태는 생기를 잃고 말았다.
새로 놓은 콘크리트 다리 때문에 달기폭포의 아름다운 자태는 생기를 잃고 말았다.
어지간히 탁 트인 곳이 아니면 워낙 숲이 울창해서 햇살 한 줌 만나기도 쉽잖다.
어지간히 탁 트인 곳이 아니면 워낙 숲이 울창해서 햇살 한 줌 만나기도 쉽잖다.
수십년 전 사라진 산속 마을 입구에서 서서 청송군청 이진규(오른쪽)씨와 박종경 화백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수십년 전 사라진 산속 마을 입구에서 서서 청송군청 이진규(오른쪽)씨와 박종경 화백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닭백숙으로 유명한 달기약수탕을 지나 1.5km쯤 더 가면 월외리가 나온다. 월외삼거리에서 마을을 끼고 왼쪽으로 접어들어 잠시만 달리면 주왕산 국립공원을 알리는 팻말과 함께 월외탐방지원센터를 만날 수 있다. 오늘 갈 길은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월외에서 출발해 산자락 깊숙이 숨어있는 너구마을을 지나 금은광이까지. 주왕산을 찾는 이들은 기암괴석의 호방함과 웅장함에 매료돼 학소대와 폭포가 연이어 자리 잡은 주방계곡 코스를 주로 택한다. 어느 곳이 더 낫다고 할 수는 없지만 숲길의 담백함을 맛보고 싶다면 너구마을과 금은광이 구간이 최적. 번잡함을 떨쳐내고 혼자만의 사색을 즐기고 싶다면 더할 나위 없는 길이다.

주왕산이 숨겨놓은 그 길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월외에서 너구마을까지 3.4km 구간은 콘크리트 포장이 돼 있다. 마을 주민들 편의를 위해 어쩔 수 없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숲이 우거진 산길의 호젓함을 빼앗아버린 것 같아 못내 아쉽다. 게다가 일부 구간에는 계곡쪽에 콘크리트 방호벽까지 세워놓아 답답함을 더했다. 다행히 지나는 차량이 별로 없어서 느긋하게 걸어볼 만한 길이다.

월외 입구에서 2km를 채 못가서 달기폭포가 나타난다. 굽이길을 돌아서자 깜짝 놀래주려는 듯 홀연히 모습을 드러내는 물줄기. 그런데 아뿔싸. 깎아지르는 절벽 사이에 유유자적 흐르는 낙수를 기대했건만 콘크리트 다리가 풍광을 영 망쳐버렸다. 가슴 한쪽이 콱 막히는 기분이다. 높이 11m의 곧추선 폭포는 대단한 위용이랄 것은 없어도 청송팔경에 꼽힐 정도로 예쁜 모습이었을 터.

너구마을까지 가는 길은 줄곧 희비가 교차한다. 변화무쌍한 산세에 감탄하고, 짙은 신록에 감동하며, 홀연히 찾아온 적막감에 감사하면서도 편의라는 미명 아래 빼앗겨버린 산행의 담백함이 사무치게 아쉽다. 주왕산에 미안해 하면서 길을 재촉했다.

다행히 너구마을에서 금은광이까지 내닫는 그 아름다운 길 덕분에 시무룩해진 기분을 달랠 수 있었다. 너구마을은 참 예쁘다. 길안내를 맡은 청송군청 이진규 씨에게 "너구리가 많아서 너구마을이냐?"고 물었더니 그저 웃고 만다. 그러면서 "너구동은 네 개의 산줄기와 네 개의 물줄기가 만나는 명당으로 꼽히던 곳"이라며 "네귀퉁이가 만나기 때문에 너구동으로 이름붙여졌다"고 했다.

산줄기 아래 제법 너른 내가 흐르고 그 옆으로 마치 숨겨둔 보물처럼 너른 땅이 펼쳐진다.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들이 숨어있던 곳이고, 일제강점기 때에는 목탄을 만드는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다섯 가구도 채 안 된다는 설명을 듣고 와 봤더니 상황이 달랐다. 너구동 동장을 맡고 있는 성순자(62) 씨는 "외지 사람들이 한둘씩 찾아와 둥지를 틀면서 지금은 15가구나 된다"고 했다. 낯선 사람이 찾아왔는데도 그저 반갑다는 듯 평상에 앉히고는 산에서 딴 돌배로 만든 것이라며 배즙까지 내왔다. 햇살에 얼굴은 그을렀지만 피부는 나이보다 10년 이상 젊어보였다. 얼마 전엔 산삼도 세 뿌리나 캐서 그 중 한 뿌리는 씹어먹었다고 했다. 마을 볼거리의 백미는 여름철 그믐밤이란다. 지천으로 반딧불이가 날아와 전깃불이 없이도 바깥일을 할 정도라고. 텃밭 농사일에도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 청정지역이기 때문이다.

마을 옆 냇가를 따라 협곡 사이로 가면 금은광이삼거리로 가는 등산로를 만날 수 있다. 오늘 걷는 길의 백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제법 널찍한 산길이지만 찾는 사람이 거의 없는 모양이다. 산길 가운데 난 풀들은 한번도 밟힌 흔적이 없다. 세상은 적막 속에 내려앉았고, 오로지 고요함을 깨는 것은 산새소리뿐이다. 명색이 국립공원인데 이처럼 한적할 수 있나 싶다. 햇살이 제법 따가웠지만 울창한 숲을 뚫고오지는 못했다. 이마에선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지만 팔뚝으로는 유쾌한 서늘함이 전해온다. 콧노래가 나왔다.

사람 흔적이라곤 찾을 수 없을 것 같던 이 길에 돌무더기가 연이어 나타났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돌담 흔적이다. 1km쯤 간 곳에 야트막한 돌담이 있기에 옛날 산사람들이 오가며 쉬던 주막일 것으로 짐작했다. 그렇게 사람의 흔적이 끝나는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다시 1km쯤 올라갔을까. 제법 너른 땅이 나오고 곳곳에 돌담이었다. 얼핏 봐도 10여호 이상 되는 마을의 흔적. 논과 밭이 있었으리라 짐작되는 자리에는 풀과 나무만이 무성하다. 주왕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게 1976년이고, 그 무렵 마을이 사라진 모양이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집 흔적도 최근에 철거한 듯했다. 강산이 세번도 넘게 변할 세월이 흐르면서 마을은 잊혀져 갔다. 허물어진 돌담 사이로, 비록 잡초가 무성할 지언정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뛰어놀았을 골목길도 남아있다. 사람이 떠난 자리엔 숲의 생명들이 머물고 있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칡뿌리를 캐먹고 있었던 모양이다. 흙이 마르지 않고 촉촉한 기운이 남아있었다. 멧돼지의 놀이터였다. 어른 서너 명이 무릎을 대고 앉을 정도로 넓게 땅이 패여 있었다. 두런거리는 사람 소리에 황급히 자리를 피한 흔적이 역력했다.

동네 흔적이 남아있는 곳까지 길은 줄곧 평탄했다.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했지만 가파르거나 급하지 않았다. 산행의 즐거움을 더한 것은 산딸기였다. 지천으로 깔린 산딸기를 따 먹으며 잠시나마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산 중턱에 학교가 있어 하굣길엔 늘 산딸기 덩굴 속을 누볐던 추억이 있다. 드문드문 산뽕나무도 보였다. 개량종과는 달리 열매가 작다. 하지만 까맣게 익은 오디는 새콤달콤한 맛이 여느 과일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초록으로 눈이 즐거웠고, 새소리에 귀가 행복한데다 산딸기와 오디 덕분에 입까지 호강했다.

너구마을에서 부지런히 걸으면 금은광이삼거리까지 90분가량 걸린다. 일제강점기 시절 골짜기 안에 금은 광산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말도 있고, 한때 '전기 없는 마을'로 유명세를 치렀던 내원마을에서 바라볼 때 아침에는 은빛이고 저녁에는 금빛 노을이 아름다워서 금은광이라고 불렀다는 말도 있다. 돌아오는 차편이 허락한다면 금은광이삼거리에서 제3폭포 쪽으로 내려오거나 장군봉을 디딘 뒤 대전사 쪽으로 내려올 수도 있다. 입구에 차를 둔 탓에 다시 되돌아나왔다. 워낙에 아는 사람들만 찾는 등산 코스인 탓에 오르내리는 내내 등산객 한 명 만나지 못했다. 돌아오는 길 내내, 숲속에 묻혀버린 그 마을이 마음에 걸렸다. 누군가의 고향이었을 그곳. 비록 지금은 쓸쓸함이 감도는 허물어진 돌담뿐이지만 떠나간 그들의 기억 속엔 영원히 생기 넘치는 따스한 곳이었으리라.

글·사진=김수용기자 ksy@msnet.co.kr

도움말=청송군청 공보실 이진규 054)870-6064

전시장소 협찬=대백프라자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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