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엄원태의 시와 함께] 책 / 박기섭

아버지, 라는 책은 표지가 울퉁불퉁했고

어머니, 라는 책은 갈피가 늘 젖어 있었다

그 밖의 많은 책들은 부록에 지나지 않았다

건성으로 읽었던가 아버지, 라는 책

새삼스레 낯선 곳의 진흙 냄새가 났고

눈길을 서둘러 떠난 발자국도 보였다

면지가 찢긴 줄은 여태껏 몰랐구나

목차마저 희미해진 어머니, 라는 책

거덜난 책등을 따라 소금쩍이 일었다

밑줄 친 곳일수록 목숨의 때는 남아

보풀이 일 만큼 일다가 잦아지고

허기진 생의 그믐에 실밥이 다 터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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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태어나 평생을 읽고 읽으며 기댈 책은 '표지가 울퉁불퉁한' 아버지와 '갈피가 늘 젖어있는' 어머니라는 책 두 권뿐, 그 밖의 많은 책들은 결국 부록에 지나지 않는다 하네요. 책에 유비된 부모님의 모습이 적실하면서도 끝내 눈물겹습니다.

자식들은 이처럼 스스로 부모가 되고 나이 들어 늙어가면서야 비로소 부모라는 존재의 상처며 생의 곤고(困苦)함을 온전히 이해하게 되는 것인가 봅니다. '면지가 찢긴 줄'도 모르고 '건성으로 읽으며' 지내다가, '실밥이 다 터져버린' 후에야 새삼 부모님이라는 존재를 절실하게 마주하게 된다는 사실이 참으로 안타깝고도 쓸쓸합니다. 우리 모두 부모님이란 불멸의 텍스트를 부디 '건성으로' 읽지 말고, 시인처럼 속속들이 읽어내도록 애써야 할 테지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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