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기술은 이제 생명체를 복제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그 생명체도 살아 있으니 영혼이 있을 것이고 인간은 이제 영혼까지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인류 문명의 오만일까, 아니면 복제된 생명체도 신의 뜻에 의해 탄생한 것일까.
생명 창조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하는 영화는 다양한 SF영화들을 통해 만들어지고 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는 4년의 수명을 연장하려는 안드로이드의 반항을 심도 있게 그렸고, 아널드 슈워제네거의 '여섯 번째의 날'이나 이완 맥그리거의 '아일랜드' 등은 인간 복제의 위험성을 정면으로 그렸다.
이번 주 개봉된 '스플라이스'는 단순한 생명 복제를 넘어 복제된 생명체와 인간의 미묘한 심리전을 그렸다는 점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미국 제약회사에 다니는 열혈 유전공학자 커플 클라이브(애드리안 브로디)와 엘사(사라 폴리)는 서로 다른 동물의 DNA를 결합한 새로운 하이브리드 동물종을 만들어 명성을 얻는다. 이제 그들은 여기에 인간의 DNA를 주입하려고 한다. 제약회사가 윤리적인 문제로 연구를 금지시키자, 둘은 비밀리에 독자적인 연구를 시작한다.
조류, 어류, 파충류, 갑각류 등의 DNA를 결합한 뒤 여기에 인간의 여성 DNA를 주입해 새로운 생명체가 탄생한다. 인간의 얼굴에 새의 다리를 가지고, 날카로운 독침이 있는 꼬리에 양서류의 폐를 지닌 생명체다. 폐기(?)할 수도 없고, 공개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새 생명체는 빠르게 성장한다. 특히 엘사는 드렌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주고 딸처럼 키운다.
3천만달러의 비교적 저렴한 예산이 들어간 이 영화는 저예산 빅히트작 '큐브'를 감독했던 캐나다의 빈센조 나탈리 감독이 연출했고 명제작자 조엘 실버와 '헬보이'의 길레르모 델토로 감독이 제작에 참여했다.
독특한 생명체를 스크린에 그려온 길레르모 델토로의 입김 때문일까. 드렌은 기이하면서도 흥미로운 매력을 지닌 캐릭터로 눈길을 끈다. 드렌은 프랑스 출신 모델 겸 배우 델핀 샤네크의 연기에 컴퓨터그래픽을 더해 만들어졌다. 감독은 저예산이지만 전체 제작비의 25%를 여기에 투입할 정도로 특수효과에 공을 들였다.
'바보'(Nerd)라는 뜻의 단어를 거꾸로 배열한 드렌은 인간적인 욕망을 가지고 이성인 클라이브와 교감을 시도하고, 엘사에게는 엘렉트라 콤플렉스(딸이 아버지에게 애정을 품고 어머니를 경쟁자로 인식하여 반감을 갖는 성향)를 보여준다.
자신이 창조한 생명체와 창조자 사이에 일어나는 복잡미묘한 감정을 잘 그린 SF 스릴러이지만 상황을 엎어놓고 보면 '스플라이스'는 부부클리닉에 나옴직한 가족 드라마이다.
엘사는 어릴 적 엄마와 불화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아이 낳기를 거부하며 모녀 관계를 극도로 기피한다. 그러나 드렌을 창조하고는 점차 엄마로서의 감정이 살아난다. 알파벳을 가르치고 립스틱을 발라주며 드렌을 딸처럼 귀여워한다. 드렌이 고열로 신음할 때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은 우리 가까이에 있는 초보 엄마의 모습이다.
그러나 드렌이 자아를 찾기 시작하면서 틈이 생긴다. 클라이브에 대한 감정이 발전하면서 엘사와 대립관계를 형성하고 이때 엘사는 자기가 끔찍이 싫어했던 엄마의 모습이 되고 만다.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려는 인간의 호기심 어린 오만을 영화는 잘 그려내 주고 있다. 이를 통해 인간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야만성도 드러낸다. 드렌이 공격적인 성향을 띠게 되는 것도 인간의 DNA의 치명적인 인자 때문이라고 묘사된다.
그러나 영화는 더 멀리 나아간다. 클라이브와 엘사, 그리고 드렌의 삼각관계로 발전하면서 '막장' 드라마의 전형을 보여준다.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의 SF스릴러 버전이랄까. 드렌의 존재를 극도로 거부하던 클라이브가 자신도 모르게 드렌에게 빠져들고 결정적으로 잡종 생명체와 성적 관계까지 맺게 되는 것은 아무리 인간의 감정이 좌충우돌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파격적이다. 마치 정신분석학적으로 접근해야 할 그리스 신화의 일면을 보는 듯하다.
이러한 파격은 애초 금기된 것을 깬 것에서 시작된다. 인간과 다른 생명체를 결합하는 시도부터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영화는 이러한 금기를 깨면서 도발된 불안감과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을 때마다 느껴지는 묘한 쾌감을 시각적으로 그려내 준다.
인간 욕망을 SF스릴러에 빗댄 흥미로운 저예산 영화지만 이런 파격이 불편할 수도 있겠다. 오만한 인간과 바람난 괴생명체의 부적절한 관계는 내 곁을 떠난 옛사랑에 대한 원초적인 원망과도 비슷한 것이다. 18세 이상 관람가. 러닝 타임 104분.
김중기 객원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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