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제칼럼] 글로벌 금융위기의 유산과 교훈

2008년 9월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으로 촉발된 미국발 금융위기는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자본주의 체제에 가장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이번 금융위기로 지난 한 세대 동안 세계경제 질서를 풍미해온 대처-레이건식 자유주의 시장경제 모델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됐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경제학 교과서를 새로 써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사람도 있다. 무엇이 이처럼 세계 경제를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서구 경제의 핵심 이데올로기인 자유시장경제 원칙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하게 된 것일까? 글로벌 관점에서 보면 영미식 신자유주의 확산과 글로벌화의 진전이라 할 수 있다.

9'11테러 이후 미 FRB의 경기부양을 위한 초저금리 정책에 편승해 일부 무절제한 금융자본들이 국가 간 울타리가 사라진 전 세계를 휘젓고 다녔다. 이들은 부동산 버블로 인한 '자산효과'(wealth effect)에 도취된 금융 소비자들의 욕망을 부추기고, 이를 바탕으로 고위험 고수익의 파생상품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명문 MBA 출신의 월가 수재들이 만들고 명망 높은 투자은행들이 파는 첨단금융상품인데다, 고수익을 가져다 준다는 점 때문에 CDS, CDO와 같은 파생상품에 엄청난 돈이 몰렸다. 그러나 천정부지로 치닫던 부동산 가격이 하락세로 돌아서면서 마침내 파국을 맞았다. 미국의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이 1980년대부터 누누이 경고했던 '돈 놓고 돈 먹기' 식의 '카지노 자본주의'가 결국 종말을 맞은 셈이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통해 세계가 얻은 교훈은 자명하다. '공짜 점심'(free lunch)은 결코 없으며 실물경제의 성장세를 뛰어넘는 금융의 지나친 양적 팽창은 거품을 낳고 부작용을 가져오므로 금융 규제는 강화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규제 강화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자유시장경제의 기본 원칙과 근간이 송두리째 바뀌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지난 1년 6개월 동안 영국을 포함하여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스웨덴 등 진보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신자유주의와 궤를 같이하고 있는 보수정당이 선거에서 잇따라 승리한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과 국제금융기구, 그리고 G20을 중심으로 한 국가들은 상당한 변화와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그 결과 '신표준'이 국제금융질서로 자리 잡을 조짐을 보이고 있다. ▷금융기관 대형화를 위한 M&A의 제한 ▷상업은행과 투자은행 간의 방호벽 설치 ▷장외 파생상품 개발의 제한과 거래의 투명화 ▷금융시장의 리스크 방지를 위한 은행세 부과 등이 논의 중이다. 오는 11월 서울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의에서는 글로벌 금융안전망 구축과 은행 자본'유동성 규제를 비롯한 금융규제 등 크게 8가지 의제가 논의될 전망이다.

한국은 올해 경제성장률이 6%대에 이르는 등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가장 먼저 벗어나는 나라에 속한다. 우리나라는 주택담보인정비율(LTV)이나 총부채상환비율(DTI)과 같은 제도적 장치를 갖추어놓은 덕분에 부동산 거품 붕괴로 인한 금융시장의 충격이 그다지 크지 않았다. 또 파생상품 거래 규모와 금융기관의 투기 및 비윤리적 거래도 미미해 금융규제 흐름에 대응하기 위한 운신의 폭이 비교적 큰 편이다.

그러나 부동산 경기 침체와 고용창출 미흡으로 소비와 투자의 회복이 더딘 가운데 유럽발 재정위기가 불거지고 있고, 그 후유증 또한 만만치 않아 경기 회복의 걸림돌로 작용할 우려가 있다. 따라서 서민들이 느끼는 체감경기를 되살리고 일자리 창출과 사회복지정책을 통해 엷어진 중산층과 늘어나는 극빈층 문제를 해소해야 할 정책적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신표준'을 제정하기 위한 국제적 움직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국내 금융산업의 안정과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는 한편, 선진 금융기관들이 주춤하는 사이에 해외 시장에서 더 많은 기회를 확보하고 국제적 위상도 높여나가야 하는 것이다.

또 국제금융감독기구의 운영이나 기축통화 체제 등 국제금융질서가 미국 일극체제에서 다극체제로 바뀌고, 시장실패의 보완을 위한 국제 공조체제도 더욱 활발하게 가동될 전망이다. 서울 G20 정상회의에서 이러한 '신기준'과 국제금융 질서의 새판을 짜는 데 우리나라가 강력한 리더십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춘수 대구은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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