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필귀정] 조급함이 만든 불행

며칠 전 대구에서 열린 2010대한민국과학기술연차대회 특별강연에서 최진민 귀뚜라미그룹 명예회장이 이런 말을 했다. "자기 혼자만 잘 먹고 잘살겠다는 게 장돌뱅이라면 장사꾼은 같이 잘살자는 기업가적 자질을 가진 사람이다. 그게 장사꾼과 장돌뱅이의 차이다."

아주 쉬우면서도 어려운 말이다. 거창하게 철학이니 신조니 윤리경영이니 하는 용어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누구나 그게 이치이자 기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부든 권력이든 명예든 어떻게든 손에 쥐겠다는 욕심으로는 어림없다. 더욱이 혼자 독차지하겠다는 심보라면 더 멀어지는 게 동서고금의 진리다.

그런데 왜 사람들의 눈에는 장사꾼의 길보다는 장돌뱅이의 길이 더 잘 보일까. 아마 그건 바로 조급증 때문일 것이다. 남이 갖는 것보다는 내가 가져야 하고 남보다 내가 더 많이 가져야 한다는 조급함이 기본을 잊게 만드는 것이다.

얼마 전 국내에도 번역돼 나와 화제를 모았던 일본 논픽션 작가 이시카와 다쿠지의 '기적의 사과'에 이런 구절이 있다. "기무라의 사과는 왜 그렇게 맛있을까? 겉모양은 지극히 평범하다. 별로 크지도 않고 형태는 살짝 일그러져 있고 작은 상처도 있다. 아무 특별할 것 없는 사과를 처음 베어 문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30년 동안 온갖 실패와 좌절 끝에 피워낸 사과나무. 지금껏 인류가 먹어보지 못한 야생의 사과를 그가 선물했다."

하지만 기무라의 사과는 사실 '기적의 사과'가 아니다. 사람들이 모르거나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다. 조급함이 기본을 내팽개치고 자연의 힘을 망각하도록 만든 것이다. 벌레 먹지 않은 달고 큰 사과만을 좇다 보니 사람들 눈에 나무만 보이고 땅은 전혀 보이지 않은 것이다. 조급함이 만든 불행이다. 서두르지 않고 자연의 순리대로 묵묵히 나무에 말을 걸고 돌보다 보니 사과나무에 기적이라는 열매가 맺힌 것이다.

사과를 맺게 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나무와 자연이라는 깨달음, 좌절한 그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네주고 성원해준 사람들, 기무라의 밭에 우리가 뿌린 농약이 조금이라도 날아가면 무농약은 헛일이 된다며 자기 밭에도 농약을 치지 않은 이웃 농부의 배려, 아무리 맛이 뛰어나고 희소가치가 높다 하더라도 비싼 값에 팔지 않고 누구나 맛보게 하겠다는 기무라의 꿈이 사실 기적의 사과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인간이 얻은 병 중 하나가 바로 조급증이다. 조급함은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성급함 때문이다. 한자인 '성급할 조(躁)'라는 글자에는 떠들다'시끄럽다는 뜻도 담겨 있다. 결과만 쫓다 보니 급해지고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니 떠들고 시끄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조급함이 어떤 상황을 만들어내고 어떤 병증을 수반하는지 이 글자가 잘 보여주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처한 현실을 들여다보면 이런 조급증으로 인해 갈수록 시끄러워지고 있는 느낌이다. 결과가 기본과 본질에 우선하는 지금 우리의 조급증은 중증이다.

세종시와 4대강, 천안함, 민간인 사찰, 경찰의 인권 침해 수사 등 여기저기서 잡음을 만들어내고 좌충우돌하는 이슈들을 보면 한꺼번에 이루고 해치우려는 성급한 마음이 빚어낸 것들이다. 부결될 것이 뻔한데도 세종시 수정안을 끝까지 국회 본회의로 끌고 가거나 정부를 좀 비판했다고 제멋대로 칼 휘두르고, 실적 올리겠다고 고문까지 하면서 수사한다면 장돌뱅이의 그것과 무엇이 다른가.

6'2지방선거가 만든 지방정부의 여소야대 상황 또한 마찬가지다. 칼자루 쥐었다고 전임자의 일을 한번에 뒤엎거나 거부하고 내 생각대로 분풀이를 해댄다면 결코 조화로운 정치가 될 수 없다. 정치라고 이름 붙이기조차 거북하다.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고 합하여 선을 이루는 게 인간사 기본임에도 서로 갈라서서 욕하고 무시하는 데서 무슨 열매를 기대할 것인가. 기본을 지키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도리와 순리를 따른다면 기무라의 사과처럼 기적의 사과도 달리는 법인데도 말이다.

徐琮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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