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부(正義府) 중앙총부는 군인을 모집하는 동시에 가장 필요한 인물을 모집하려고 지난달 중순 특파원 3명을 내지로 파견했다. 그들은 교묘히 국경을 넘어 벌써 경성 시내로 잠입해서 가장 심지가 강직한 부원을 모집하는 동시에 자금을 청구하여 갔다. 이 정보를 접한 도 경찰부 이하 시내 각 서에서는 비밀리에 활동을 하는 중이다."
일제 치하인 1926년 2월 18일자 신문 기사다. 남만주 한인사회 정부이자 항일 무장 투쟁을 이끈 정의부가 독립군과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요원을 보낼 때 서울과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등지에 파견된 이들이 김세준, 김홍식, 그리고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이광민 선생이다.
이광민 선생은 만주 독립운동의 초석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백부인 석주 이상룡 선생이 만주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 임정 초대 국무령으로서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보필, 경호하는 데 평생 소홀함이 없었다.
나라를 잃고 맞은 첫 새해인 1911년 1월 석주가 가족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의 길을 떠날 때 선생은 겨우 16세 나이로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1932년 석주가 끝내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74세로 서거하자 일가 대부분이 국내로 귀국했지만 선생만은 끝까지 만주에서의 독립 투쟁을 이어갔다. 일제가 중국 대륙으로 야수의 발톱을 들이댈 때 조국이 독립하려면 시간이 더 있어야 하겠다는 판단 아래 길림성 서란현에 있던 석주의 가묘를 보다 북쪽인 하얼빈으로 이장한 것도 선생이다.
선생은 또 평생을 독립운동의 통합에 바쳤다. 1924년 서로군정서 대표로 활약하면서 남만주 지역 8개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해 정의부를 탄생시키는 데 주도적인 일을 했다. 각각의 이념을 고집하지 말고 대동단결해 일제를 물리치자는 민족유일당운동에도 정의부 대표로서 앞장섰다.
선생은 우리 고장이 배출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범(典範)이다. 그의 가문은 백부인 석주를 비롯한 3형제, 자신과 3명의 사촌, 조카까지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한 진정한 명문가다. 9일 안동 임청각에서 선생을 기리는 공훈 선양 학술강연회가 예정돼 있는데, 해방을 맞은 두 달 뒤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만주 땅에서 눈을 감았던 선생에게 조국과 고향은 얼마나 달라졌을지 궁금하다.
이상훈 북부지역본부장 azzza@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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