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말 최치원은 세파에 지친 육신을 누일 은둔지로 가야산을 택했다. 당(唐)에서는 출세가도를 달리던 엘리트 관료로, 신라에서는 천재 경륜가로 명성을 떨친 그였지만 어느 곳에서도 뿌리를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에서는 지독한 향수병이, 신라에서는 골품제의 장벽이 그를 좌절케 했다. 이미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상처를 입은 그가 은거를 택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 모른다.
남산제일봉, 가야산 일대에는 고운(孤雲)의 행적을 따라 많은 에피소드가 생생하게 남아있다. 자신을 알아줄 주군(主君)을 만나지 못해 늘 아웃사이더였던 그는 40대에 풍류객이 되어 합천을 떠돈다. 고운은 어느 날 헤진 갓과 신발만 남겨두고 산에서 사라졌다. 그의 호(號)처럼 외로운 구름이 되어.
#남산제일봉,'매화산'으로 오해 받아
남산제일봉은 거창, 합천 산들의 지맥으로 가야산 국립공원의 일부로 포함되어 있다. 동서로 능선을 이루고 있는 기암괴석들이 주위의 봉우리들과 멋진 하모니를 이룬다. 불가에서는 수백 개의 바위봉우리들이 능선을 덮고 있는 모습이 마치 불상이 도열해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해서 천불산(千佛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해인사를 기준으로 절의 '남쪽에 있는 가장 높은 봉우리'라는 의미로 산 이름이 붙게 되었다. 일부에서는 남산제일봉을 매화산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매화산은 남쪽에 위치한 별개의 산이다.
정상으로 오르는 관문인 청량사에 이르는 길은 크게 두 가지. 홍류동천(紅流洞川), 농산정을 거쳐 청량사로 오르는 길과 무릉동-황산저수지를 거쳐 청량사로 오르는 코스다. 최치원의 행적을 더듬으며 조용히 오르기에는 농산정 코스가 적합하다.
취재팀은 무릉동-청량사 코스를 택해 산행에 나선다. 입구에서 시원한 물줄기의 홍류동 계곡이 마중을 나온다. 합천8경 중 하나인 홍류동 계곡은 공원 입구에서 해인사에 이르는 십리길 계곡을 말한다.
가을 단풍이 날릴 때면 흐르는 물에 홍엽이 빨갛게 비친다고 해서 '홍류동'(紅流洞)이란 이름이 유래됐다. 이 계곡은 고운의 산책로이며 소요길. 계곡 주변엔 고운과 관련된 유적들이 늘어서 있다. 물 흐르는 소리에 귀가 먹었다고 해서 붙여진 농산정(籠山亭), 애송시를 새긴 제시석(題詩石), 꽂아둔 지팡이가 1천년 고목을 이루었다는 학사대(學士臺) 등.
#청량사 이르러 최치원의 행적 따라
무릉동 다리를 지날 때쯤 계곡 좌우로 늘어선 도자기 공장들과 만난다. 합천은 옛날부터 요업이 성행했던 곳이다. 조선시대엔 관요지인 '장흥고'가 위치해 있었고, 1970년대만 해도 40여개의 도자기 공장들이 밀집해 사기촌을 이루고 있었다. 땔감이 풍부한 데다 주변에 양질의 고령토가 넉넉해 최적의 조건을 갖췄기 때문이다. 지금은 현대화, 자동화 추세에 밀려 상당수가 문을 닫았다.
무릉동 다리를 지나 30분쯤 걸어 청량사에 이른다. 청량사는 해인사, 고견사와 함께 가야산 자락을 대표하는 사찰이다. 보물급 문화재 3점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사찰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지난 회에 거창 고견사(古見寺)에서의 고운의 일화를 살펴본 것처럼 여기서도 최치원의 발자취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도 '청량사는 고운이 즐겨 찾던 곳'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고운은 후대에 유선(儒仙)으로 불릴 정도로 유학의 태두였지만 유불(儒佛)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청량사에서 고운의 산책로를 따라 취재팀은 남산제일봉으로 오른다. 정상까지는 2㎞ 남짓한 거리지만 가파른 경사길이라 체력 소모가 크다.
드디어 정상이다. 북쪽으로 나지막한 오봉산과 해인사가 산너울을 펼쳐 놓았다. 시선을 조금 멀리 던지면 두리봉, 상왕봉과 칠불봉이 눈맛을 보탠다. 남산제일봉은 주변의 의상봉, 칠불봉과 유사하다. 현란한 기암괴석들의 퍼레이드, 가파로운 철계단, 사방이 펑 트인 전망까지 꼭 닮아 있다. 누구는 이런 조합을 석화성(石火星, 바위로 된 불꽃)으로 묘사했다. 원래 바위는 불(火)의 기운과 통한다고 하니 적절한 비유로 생각된다.
#봉우리 불 기운 누르려 소금단지 묻어
불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남산제일봉에는 불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선시대 해인사는 모두 7차례 큰 화재가 발생했다. 풍수가들은 그 원인으로 남산제일봉의 화기(火氣)를 들었다. 봉우리의 불 기운이 절로 날아들어 불이 났다는 것이다.
절에서는 화기를 누른다는 의미로 매년 단오날마다 소금단지를 묻기 시작했다. 하국근 명리'풍수연구원 희실재 원장은 "소금은 바다고 물 기운(水氣)을 의미하니 수기로 화기를 누른다는 일종의 '비보염승'(裨補厭勝) 처방이고 단오날을 택한 이유는 그날이 1년 중 양기가 가장 센 날이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정상에서 감동을 뒤로 하고 취재팀은 치인리 방향으로 하산길을 잡는다. 길 옆으로 흐르는 계곡을 따라 쾌적한 하산길은 계속된다. 7월의 숲, 가끔씩 새들도 목청을 높여 발걸음의 무게를 덜어준다. 종점인 치인리는 본래 최치원 가족들이 살았다 해서 치원촌으로 불렸다. 후에 치인촌으로 불리다가 지금의 치인리가 됐다. 청량사-남산제일봉-치인리 코스는 7㎞ 남짓. 시간도 3, 4시간이면 충분하다.
합천과 거창의 산, 계곡, 사찰은 모두 고운의 발자취가 어린 역사의 현장이다. 40대에 관직을 버리고 초야에 몸을 던진 고운. 비겁한 지식인의 전형인가, 모든 경계를 넘나드는 영원한 자유인인가. 고운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진행형이고 그 판단도 각자의 몫이다.
온 산을 한바퀴 돌아 다시 홍류동 계곡에 선다. 귀가길 눈길은 자꾸 계곡으로 향하고 발걸음은 도시로의 귀환을 주저한다. 제일봉 자락에 걸린 외로운 구름 하나, 공연히 바삐 맴을 돈다.
글'사진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전광훈 "대선 출마하겠다"…서울 도심 곳곳은 '윤 어게인'
이재명, 민주당 충청 경선서 88.15%로 압승…김동연 2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