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끝나지 않은 6·25] ⑮낙동강아 잘 있거라

낙동강 포진 20만 한·미 연합군에 총반격 명령

6·25당시 더글라스 맥아더 유엔 사령관
6·25당시 더글라스 맥아더 유엔 사령관

1950년 9월 16일.

한반도의 허리를 자른 유엔군의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으로써 낙동강 교두보에서 교착 상태에 빠져 있던 한·미 연합군에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한·미 연합군은 낙동강 교두보에서 2개월 동안 적 13개 사단의 쉴 새 없는 맹공으로 숨막힐 듯한 교전을 계속해 오는 동안 몇 차례 아슬아슬한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특히 대구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8군 사령부를 부산으로 철수시킬 계획까지 마련했었다.

그러나 이제부터 수세에 몰리기만 했던 설욕을 딛고 울분을 풀 기회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월튼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인천상륙작전이 순조롭게 진행 중인 것을 확인하고 이날 오전 9시를 기해 낙동강 교두보에 포진해 있던 한·미 연합군에 총반격을 명령한다. 한·미 연합군의 20만 병력이 M-26 퍼싱, M4-A3 셔먼, M-46 패튼 등 최신형 탱크 650대를 앞세우고 대대적인 반격 작전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한·미 연합군의 반격 작전에 투입된 탱크만도 북한 공산군이 38선을 뚫고 전면 남침을 감행할 무렵의 T-34 탱크 240대보다 3배 가까이 이르는 엄청난 화력이었다. 이 때문에 다부동 일원과 영천에서 대구 점령을 위해 한 달여 동안 시산혈하(屍山血河)를 이루었던 공산군 3사단과 13사단 및 8사단, 15사단은 완전히 퇴로를 잃고 지리멸렬한 상태로 빠져들고 있었다. 다부동 전투에서만도 5천700여 명이 사살되고 T-34 탱크 23대와 포차 50대, 자주포·박격포 등 중화기를 비롯한 각종 화력이 모두 파괴되는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적은 그때까지만 해도 완강하게 저항했다. 게다가 장맛비가 줄기차게 쏟아지는 바람에 적진에 포·폭격을 감행할 수도 없었다. 이 같은 악천후는 쫓기는 적에게 오히려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했다. 그래서 김일성은 최후까지도 대구·부산 공략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한반도 적화통일의 대업을 눈앞에 두고 도저히 물러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워커 사령관이 총반격 명령을 내린 16일에도 대구에 근접한 인민군 13사단의 포대에서 맹렬한 공격을 가해오고 있었다. 대구 분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가산산성에는 이미 선발대가 침투해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가산산성에 매복해 있던 특수공작대는 이미 전멸해 버렸고 뒤이어 침투해온 13사단의 선발대도 한국군 제1사단 11연대의 추격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포항과 안강·기계지역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던 국군 제3사단과 수도사단도 반전의 승기를 잡고 일제히 반격전에 나섰다. 수도사단은 경주 정면에서 안강 회랑을 거쳐 기계로 진출해 완강히 저항하는 적 12사단을 비학산 방면으로 철퇴시켰고 3사단은 포항의 형산강 남안에 진출하여 시가전으로 적 5사단을 쫓고 있었다. 치열한 격전을 치르며 4차례나 공방전을 전개했던 영천지역에는 적의 그림자조차 구경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적은 국지전으로 전환하면서 게릴라 전술로 아군에 계속 타격을 가했다. 김일성으로서는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땅을 치고 통곡하고 싶을 정도로 원통하고 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세의 흐름을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패전의 징조가 더욱 뚜렷해지고 있었다. 9월 20일 인민군 13사단 참모장 이학구가 투항한 데 이어 21일에는 선산 방면의 낙동강 교두보에 남아 있다 대전으로 퇴각한 제1집단군은 물론 중동부전선의 제2집단군도 지휘부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22일 "적중 깊숙이 돌진하여 포위나 우회작전으로 적의 퇴로를 막고 조직적인 후퇴를 저지하라"는 대추격전에 대한 작명을 하달했다. 개전 초기 최초로 한국전에 투입되었다가 대전에서 패퇴하며 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이 공산군의 포로가 되는 치욕을 겪었던 미 제24사단은 복수전에 불타 있었다. 낙동강 교두보를 박차고 북진하는 24사단의 트럭 등 각종 차량에는 '대전을 잊지 말자!'는 슬로건을 붙여 대전 탈환을 다짐하고 있었다.

순조롭게 북상하던 미 24사단은 김천에서 적 105탱크사단의 최신형 T-34 탱크 10여 대와 맞닥뜨려 탱크전이 벌어졌으나 아군의 M-46 패튼 탱크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미 24사단은 그 길로 김천을 탈환하고 경부국도를 따라 추풍령과 영동 황간의 험로를 지나 27일 옥천에 진출했다. 김천에서 적 9사단의 필사적인 저항을 받은 것 외에 별다른 교전도 없이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 온 것이다. 이 진격로는 미 24사단이 2개월여 전 대전에서 퇴각하던 길이어서 병사들은 남다른 감회가 깊었다.

그러나 이날 오전 6시쯤 진격을 재개한 24사단은 대전으로 진입하는 동쪽 능선에서 최후의 방어전에 돌입한 적의 완강한 저항에 부닥쳤다. 이 능선은 24사단 병사들에게는 악몽이 깃든 원한의 능선이기도 했다. 지난 7월 20일 이 능선 아래의 굴다리에서 퇴로가 막혀 뿔뿔이 흩어져 천신만고 끝에 낙동강 교두보까지 후퇴했기 때문이다. 그 무렵 사단장 딘 장군도 이 능선을 넘어 후퇴하려다 길이 막혀 36일 동안 적중을 헤매던 끝에 전북 진안 마이산 아래에서 주민의 신고로 적의 포로가 된 것이다. 미 24사단으로서는 치욕의 능선이 아닐 수 없다.

미군 병사들이 공군 전폭기의 지원을 받아 능선을 탈환하고 보니 김천과 성주 방면에서 내내 쫓기던 적 9·10사단의 잔존 병력들이 저항하고 있었다. 미 24사단은 대전 소탕전에서 적의 T-34 탱크 34대를 격파하고 2천여 명의 패잔병을 포로로 잡았다. 대전에는 낙동강 전선에서 쫓겨난 7개 사단의 적 패잔병들이 집결해 있었던 것이다. 9월 28일 대한민국 수도 서울이 유엔군에 의해 수복되고 동시에 미 24사단이 절치부심하고 있던 대전도 탈환했다.

이용우(언론인·칼럼니스트)

※끝나지 않은 6·25-낙동강에 울리는 위령곡 시리즈는 이번 회로 끝을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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