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선망→갈등→상생' 대구, 미군부대 주둔 60년의 명암

9일 오전 대구시 남구 이천동의 한 고층 아파트에서 내려다본 미군 부대 캠프 헨리. 우태욱기자 woo@msnet.co.kr
9일 오전 대구시 남구 이천동의 한 고층 아파트에서 내려다본 미군 부대 캠프 헨리. 우태욱기자 woo@msnet.co.kr

'양키, 씨레이션, 야전점퍼, 양담배, 양주, 양공주, 외제 화장품, 양키시장, 미군 PX, 캠프워커 골프장, 미제 초콜릿, 음료수, 외국 맥주, 전자제품....' 40대 이상의 대구 시민들이 미군부대를 떠올리면 연상되는 단어들이다.

지금도 캠프 헨리와 캠프 워커, 캠프 조지 등 미군 주둔지가 있는 대구시민들에게 미군부대의 존재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시대별로 부러움의 대상에서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변했고 이제는 공존·상생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발전했다.

◆미군 주둔 60주년

미군부대가 대구에 8군사령부라는 이름으로 설치된 지 오늘로 60년을 맞았다. 1945년 해방직후 미군의 대구 진주가 잠시 있었지만 1949년 철수했다. 지금과 같이 본격적인 군대의 상주 형태는 6·25 전쟁 발발로 한반도가 화염에 휩싸인 지 보름을 갓 넘긴 7월 9일의 일이다. 현재의 대구중학교 맞은 편, 남구 이천동 캠프 헨리 자리다. 대구중학교는 일제시대때부터 캠프 헨리 자리에 있었으나 미군 진주로 맞은편 부지로 옮겨야 했다. 그리고 13일은 워커(Harris walton walker, 1889.12.3~1950.12.23) 중장이 첫 8군 사령관으로 대구에 부임한 날이다.

60년 전 대구의 첫 미군부대는 전쟁을 총 지휘하는 사령부였지만 한국전쟁이 끝난 뒤 사령부가 서울 용산으로 옮겨가고 상당수 미군의 철수는 대구의 미군부대 비중을 크게 줄게 했다. 시대별로 미군부대의 대구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줄어들고 있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미군부대의 존재는 열악하기만 했던 대구 경제에 큰 기여를 한 것이 사실이다. 미군들이 주로 드나드는 업소는 불야성을 이루었다. 미제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들이 많았다. 괜찮게 사는 집에 가서 미제 과자와 사탕 초콜릿을 맛보고는 자랑을 하던 기억을 갖고 있던 시대였다.

◆이제는 남구 발전의 걸림돌?

주한미군에 대한 시선이 달라진 것은 1980년대 들어서다. 1979년 2차 철군 이후 미군부대의 영향력 축소의 탓도 있었지만 이때부터 불기 시작한 반미 열풍은 미군부대 앞 풍경을 바꾸어 놓았다.

남구청에서 미군부대 관련 업무를 맡아 온 손기영(45) 대명4동 사무장은 "대구 남구의 경제와 사회, 문화에 미군부대가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우리의 국력이 미약하고 살림이 형편없을 때는 미군부대의 지역 경제 기여도가 만만치 않았다"며 격세지감을 회고했다. 그는 이어 "미군부대 출입증이 선민(選民)의 신분증처럼 비치던 때도 있었지만 1980년대 광풍처럼 불어닥친 반미 바람 속에 극복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역사를 뒤로 하고 상생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할 정도로 시민들의 의식이 성숙돼 있는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현재 대구도시계획을 가로막고 있는 미군부대 이전 문제는 계속 민감한 문제로 남아 있다. 당장 문제가 되는 것은 남구 봉덕동 캠프워커 일원이다. 총 74만여㎡ 이지만 이중 활주로 부지, A3 헬기장 부지 등 7만6천518㎡가 이전 예정지다. 예정은 돼 있지만 넘어야 할 산은 아직 많다. 예산을 확보해야 하고 이전 대체 부지를 마련해야 한다.

임병헌 남구청장은 "미군 부대의 존재로 수십 년째 개발과는 담을 쌓아야 했지만 어느 때보다 상생의 분위기가 조성된 지금 서로 윈윈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며 기대감을 표시했다.

이동관기자 dkd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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