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말에 '겉보리 서 말만 있어도 처가살이는 안 한다' '뒷간과 처가는 멀수록 좋다'고 했다. 하지만 요즘 이런 말을 했다가는 시대에 뒤떨어진 인물로 낙인찍히기 십상이다. 신세대 부부들은 처가살이는 아니더라도 처가와 가까운 곳에 둥지를 틀고 처가의 도움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다. 남편들에게는 친가보다 처가가 모든 면에서 가깝다. 휴일이나 명절에는 처가에서 훨씬 많은 시간을 보낸다. '신(新) 처가살이' 시대, 남편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살까. 21세기 들어 보편화하는 '신 처가살이'에 담긴 명암을 들여다봤다.
◆신(新) 처가살이는 대세
이기훈(32·대구 중구 대봉동) 씨는 1년 전 신혼집을 처가와 같은 아파트단지 내에 잡았다. 구미로 출퇴근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고속도로 진입이 쉬운 성서나 북구 서변동 부근에 신혼집을 잡으려고 했으나 아내가 처가 인근을 고집해 지금의 아파트에 살게 됐다. 이 씨는 "아파트를 구입할 때 처가에서 상당 부분을 지원해준 데다 장차 아이 양육 문제도 고려했다"고 말했다. 최창진(39) 씨는 처가가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다. 같은 직장에 다니는 아내와 함께 아침 일찍 회사에 출근하면서 두살배기 아들을 처가에 맡긴다. 최 씨는 "아이가 너무 어려 어린이집에 보내기는 부담스럽다. 아이를 부탁하기에 아무래도 처가가 편해 처가 근처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젊은 부부들이 처가와 가까운 곳에 집을 마련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이 양육 문제다. 대부분 맞벌이를 하다 보니 아이를 마땅히 맡길 곳이 없어 자연스레 처가에 도움을 요청하게 되고, 아무래도 처가와 왕래가 손쉬운 거리에 집을 구하게 되는 것이다.
경제적인 이유로 처가살이를 하는 남성들도 더러 있다. 결혼 5년차인 김모(34) 씨는 6개월 전부터 처가살이를 시작했다. 혼자 직장에 다니는데 아이가 둘이라 돈이 거의 모이지 않는 형편인데 장모가 "몇 년만 처가살이해서 목돈을 마련해 독립하라"고 계속 권유했기 때문이다. 김 씨는 "우리집에서 사는 것보다 부담스럽긴 하지만 장인·장모가 여러 가지 배려를 많이 해 줘 편하다"고 말했다.
신 처가살이의 확산은 처가를 보는 남성들의 시각이 많이 달라진 점도 크게 작용한다. 처가살이를 가장으로서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행위나 부끄러운 일이라고 단정짓기보다 육아나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돌파구로 여긴다. 그만큼 남성들의 사고가 유연해진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젊을수록 더욱 두드러진다.
구인구직 포털 알바몬(www.albamon.com)이 지난해 대학생 918명을 대상으로 '결혼 인식'에 대해 설문조사한 결과 전체 남학생의 63.3%가 '처가살이도 좋다'고 답했다. 이는 '시집살이도 좋다'고 답한 여학생의 비율(45.8%)보다 훨씬 높은 수치다. 처가살이나 시집살이를 하려는 이유로는 '배우자의 부모님 역시 내 부모님과 마찬가지라서'(32.1%)를 가장 먼저 꼽았지만 '신혼자금을 아낄 수 있어서'(24.0%), '육아와 살림에 도움이 돼서'(21.2%), '생활비 등 경제적 여유 때문에'(10.7%) 등 현실적인 이유가 절반을 넘었다.
성별로 따져보면 남성들의 인식 변화가 두드러짐을 알 수 있다. 여학생들이 시집살이도 좋다고 한 이유로 '배우자의 부모님 역시 부모님'이라는 항목을 가장 많이(43.9%) 꼽은 데 비해 남학생들은 '신혼집 마련 등 초기 신혼자금 절약'을 35.5%로 가장 많이 선택했다. 대학생 박성찬(23) 씨는 "우리 세대들은 기성세대와 달리 권위나 위신보다 실속을 따진다. 요즘은 집값이나 교육비 등이 너무 비싸기 때문에 처가살이도 하나의 전략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말 못할 서러움과 눈치도…
'신 처가살이'가 온전히 좋은 것만은 아니다. 남성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터놓을 수 없는 애환도 심심찮게 겪는다. 가장으로서의 위상이 떨어지고 상대적으로 친가에 소홀해지기 때문이다.
결혼 6년차인 이모(41) 씨는 최근 아내로부터 일방적인 제안을 받았다. 8월 초에 여름 휴가를 처가 식구들과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이 씨는 "거의 통보 수준이라 도저히 반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며칠 전에는 비행기표까지 예약해놓았다고 못을 박았다"며 "결혼 때부터 처가 가까이 집을 구하자고 고집해 갈등이 있었는데 점점 처가에 신세 질 일이 많아지다 보니 가장으로서 서운할 때가 더러 있다"고 말했다.
최모(39) 씨는 주말마다 처가를 찾는다. 맞벌이를 하는 관계로 처가에 아이를 맡기다 보니 자주 찾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다. 최 씨는 처가에 가서 설거지나 청소도 자주 하는 등 이래저래 잘 하려고 애쓴다. 반면 친가는 한 달에 한번 가기도 힘들다. 최 씨는 "아이를 맡기니까 여러 모로 빚을 진다는 생각에 신경이 많이 쓰인다"며 "부모님이 이해는 해 주시지만 섭섭해하는 마음이 뻔히 보여 친가에 갈 때마다 송구스러울 뿐"이라고 했다.
부부가 갈등을 겪는 경우도 적잖다. 처가에 들어가 산 지 3개월째인 자영업자 김모(34) 씨는 시간이 지날수록 나가서 살고 싶은 마음이 커진다. 처가에 들어올 때는 경제적 여유가 없는데다 아내가 세 살짜리 딸을 혼자 키우는 걸 버거워 해 어쩔 수 없이 승낙했지만, 사업이 어려워져 지난 달 생활비조로 장모에게 주던 용돈을 못 주면서 장모와의 사이가 급격히 틀어진 것이다. 김 씨는 장모가 가끔 사업이 왜 그리 안 풀리냐고 핀잔을 주거나 늘그막에 고생스럽다고 할 때는 정말 나가고 싶다고 했다.
3년 전 회사 대구 지사에서 서울 본사로 자리를 옮긴 김모(37) 씨는 지난해 처가의 도움을 받아 서울에 아파트를 샀다. 서울 아파트값은 대구의 2, 3배라 구입할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처가에서 목돈을 빌려준 덕에 내 집 마련이 가능했다. 김 씨는 "대구에 한 번씩 오면 친가보다는 처가부터 먼저 찾아가야 하고, 갈 때마다 빚진 마음이 들어 사위 대접은 기대도 하지 못한다"고 했다.
처가와 가까워지면서 아내의 입김이 세지고 가정 내 주도권도 점차 아내에게 넘어가는 경향도 보인다. 가부장제의 틀 속에서 성장해온 남편들로서는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게 마련. 김 씨는 "아내에게 주도권을 뺏겼다고 하소연했다가는 '무능하고 못난 놈'으로 취급받을 것 같아 혼자 속으로 삼킨다. 요즘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처가살이 남성들의 애환이 가슴에 와닿을 때가 많다"고 말했다.
처가 중심의 가족관계는 극단적일 경우 장모와 사위 간 갈등으로 이어지고 이혼 사유로도 떠오르고 있다. 요즘은 경제력이 떨어진다며 사위를 무시하거나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장모도 적잖아 부부관계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처가살이를 하더라도 당당하게 가족의 일원으로 생활하고 최소한의 경제력은 지켜야 한다"고 조언한다.
전창훈기자 apolon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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