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작영화리뷰] 이끼

경북 산골 이장님 정재영 '사투리 카리스마' 생생

이끼는 최초로 육상생활에 적응한 식물이다. 음습한 바위 틈에 몸을 숨기고, 숱한 비바람을 견디며 꽃을 피우거나, 우거진 그늘을 자랑하지도 않고, 오로지 자신의 생존만을 위해 납작 엎드려 버텨온 생명체다.

윤태호의 인터넷 만화 '이끼'는 이런 이끼와 같은 한 인간의 모습을 잘 그려냈다. 칠순을 넘긴 천용덕이라는 사내. 20여 년간 '순사밥'을 먹으며 산전수전을 겪고 이제 경북 어느 산골 마을의 이장인 노인이다. 노회하고, 여전히 탐욕스러우며 끊임없이 인간을 손 위에 올려놓고 조종하려는 인간이다. 온갖 부정과 불법을 저지르면서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는 '인간이 되고픈' 동물. 만화 '이끼'는 한 인간의 삶을 입체적이고 밀도 있게 그려 인기를 끌었다.

강우석 감독의 '이끼'는 동명 만화를 영화로 옮겼다. 서슬 퍼런 검사까지 촌구석으로 몰아넣은 까칠한 성격의 해국(박해일)이 20년간 의절한 채 지내온 아버지 유목형(허준호)의 부고 소식을 듣고 시골 마을로 내려온다. 막장까지 간 삶이라 도피하는 마음으로 찾은 마을. 그러나 처음부터 마뜩잖다. 오자마자 "언제 가냐?"라며 등을 떠밀며 경계하는 눈초리들. 사인을 묻자 경찰은 "그건 다 이장님(정재영)이 알아서 하신다"고 한다.

장례를 마치자마자 마을 사람들은 가라는 듯이 환송회를 연다. 까칠한 성격이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아무데도 안 가요. 여기 있을 거예요." 순박해 보이던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진다. 섬뜩하고, 음산한 이 느낌. 여기는 뭔가 있어. 아버지는 왜 죽었을까. 혹시 살인은 아닐까. 그리고 하얀 머리의 저 노인네는 뭘까. 마을 사람들에게 신적인 존재. 그와 아버지는 어떤 관계일까.

영화는 결말을 제외하고는 원작에 충실한 편이다. 흐름과 등장인물들의 관계, 대사에 화면 구도까지 원작과 비슷하다.

그러나 톤은 상당히 다르다. 만화가 남저음 내레이션이라면, 영화는 달뜬 수다다. 강우석식 코미디가 가미된 때문이다.

좀 덜떨어진 김덕천(유해진)이 오락가락하는 장면이나, 범죄 신고가 119인지 1588인지 헷갈려하는 해국의 대사, 박 검사(유준상)가 "당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자 천용덕이 "내가 니하고 연애하자 카나?"라는 혼잣말 등은 폭소를 자아낸다.

코미디와 버무려졌지만 영화는 묵직하게 흘러간다. 천용덕의 삶에 가세한 범죄인간 전석만(김상호), 하성규(김준배)의 사연, 의문으로 싸인 아버지의 과거, 그들을 엮고 있는 천용덕의 행적 등이 마을을 엮고 있는 땅굴처럼 세밀하게 그려진다.

원작과 달리 김덕천은 밝고 쾌활한 이미지로 묘사된다. 천용덕의 매질로 충실한 개가 된 탓에 음흉하고 어둡지만, 영화에서는 극의 탄력을 주는 역할을 맡았다. 철저하게 마을 남자들에게 유린당하면서도 잡초적인 근성으로 살아가는 원작의 영지(유선) 또한 예쁘장한 이미지로 화장을 했고, '공공의 적'의 검사를 판박이한 박민욱 검사도 강우석식으로 덧칠됐다.

전반적으로 배우들의 연기는 좋은 편이다. 냉철한 이미지의 박해일이 주머니 속 송곳 같은 성격의 해국을 잘 연기하고, 유해진과 김상호가 코믹하면서 어두운 이중적 캐릭터를 잘 소화해내고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천용덕을 연기한 정재영. 본능으로 뭉쳐진 사악한 캐릭터와 함께 경상도 사투리의 의뭉한 노인 역을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스크린을 채운다.

대중성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스릴러적인 요소와 코믹한 재미가 잘 묻어난다. 몇몇 캐릭터가 상투적이지만, 그런대로 영화 속에 잘 녹아들었다.

원작이 있다는 것은 굵은 드라마의 톤을 잡기에는 유리하지만 불편한 면도 있다. 특히 만화의 경우 스틸의 잔향을 초당 24프레임의 영상으로 보여준다는 점이 힘들다. 해국이 땅굴에서 정전이 되기 전 언뜻 본 뱀처럼 뒤엉킨 영지와 남자들의 잔상 또한 표현하기 어려웠는지 영화에서는 삭제되었다. 만화적 묘미가 한껏 발휘된 장면인데, 아쉽다.

1970, 80년대 국토개발과 그린벨트 등 산업화 과정에서 잉태된 천용덕과 유목형의 궤적 또한 영화에서는 깊이 있게 다루지 않았다.

그렇다면 원작 만화를 읽고 영화를 봐야 할까. 그것은 좋은 선택이 아닐 듯싶다. 영화와 원작 만화는 드라마와 캐릭터 등은 비슷하지만 장르적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원작에 치중하면 자칫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다소 뜬금없는 결말도 그렇다. 전혀 다른 매체로 이해하면 영화를 더욱 독립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상영시간은 2시간 38분이다. 사이즈에 비중을 둔 때문일까. 2시간 내에서 영화적으로 압축하지 못한 것 또한 아쉽다. 15일 개봉. 청소년 관람불가.

김중기 객원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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