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여행 중 낯선 거리에서 갑자기 화장실이 급하다면, 게다가 손짓 발짓으로도 의사소통이 안 된다면?' 두말없이 최악의 상황이다. 이때 주위에 눈에 익은 화장실 표시가 보인다면 구세주가 따로 없다. 이처럼 화장실 표시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만국 공통어다. 전문용어로 픽토그램(pictogram)이라고 하는 이 표시는 간단한 그림으로 세계 어느나라에서든 화장실을 나타내는 일종의 약속인 셈이다. 글로벌 시대, 픽토그램을 알아두면 말과 글을 모르더라도 지구촌 어디서든 손쉽게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때마침 내년에 열리는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앞두고 대구시가 독자적인 픽토그램을 개발, 보급에 나서고 있다.
▶'말과 글이 필요없다'
2011년 8월 27일 오전 대구공항.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관람하기 위해 대구를 찾은 미국인 로버트 존슨 씨. 앞으로 9일간 펼쳐지는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즐길 수 있다는 기대로 장장 20시간이 넘는 비행기 여행도 마다 않고 열 살인 딸 제이미와 함께 대구를 찾았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공항을 나서려는 순간, 딸아이가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한다. 마침 국제선 도착장 앞에 각종 편의시설이 소개된 안내판이 눈에 띄었다. 손쉽게 화장실을 찾아내고 딸 제이미를 화장실 앞으로 데리고 갔다. 여자 그림이 그려져 있는 화장실로 들어가 볼일을 마치고 나온 제이미. 존슨 씨는 딸을 데리고 택시 그림이 그려져 있는 승강장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숙소인 인터불고 호텔로 향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대구시내를 구경하던 제이미가 망우당 네거리 근처에서 입을 뗀다. "아빠 저기 집 모양에 알파벳 M자가 그려진 안내판이 있는데 뭘 하는 곳인가요?" '그리스 신전 모양에 박물관을 뜻하는 M자가 들어간 모양이 영락없는 박물관'이라고 생각한 존슨 씨는 택시에서 내려 딸과 함께 그곳을 갔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은 역사박물관이었다. 존슨 씨는 어린 딸과 함께 이곳에서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펼치지는 대구의 역사와 문화를 알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인터불고 호텔에서 체크인을 마친 존슨 씨는 개회식까지 시간이 남아 인근 동촌 유원지를 찾았다. 제이미가 신이 나서 다시 물었다. "저기 자전거 그림은 무슨 뜻이에요?" "자전거 길이란 뜻이야." 존슨 씨는 딸과 함께 자전거를 빌려서 신나게 탄 뒤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개회식이 열리는 월드컵 경기장으로 향했다.
6만6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구월드컵경기장의 규모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존슨 씨는 딸아이의 손을 꼭 잡았다. 한국말이라곤 '안녕하세요'밖에 할 줄 모르는데다 자칫 엄청난 인파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존슨 씨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매표소 입구에 있는 안내판에는 출입구와 엘리베이터 위치, 안내소, 매점, 약국 등을 상징하는 그림이 지도와 함께 상세히 표기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어를 전혀 몰랐지만 경기 관람에도 전혀 지장이 없었다. 경기장 내 전광판을 통해 높이뛰기, 멀리뛰기 등을 나타내는 그림이 다음 경기를 안내해준 덕분이다.
관람 후 경기장을 나오면서 제이미가 다시 질문을 했다. "동그라미 속에 있는 물음표는 뭐예요?" "궁금한 것을 물어볼 수 있는 안내소란다." 존슨 씨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
▶묻고 또 묻고…불편한 대구관광
존슨 씨가 1년 전인 요즘 대구를 방문했다면 유쾌한(?) 여행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공공기관과 교통시설, 쇼핑시설, 공원은 물론 월드컵 경기장에서도 한국어를 못 하는 불편을 톡톡히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한국관광공사가 2008년 방한한 외국인 관광객 1만1천978명을 대상으로 한국관광 만족도를 조사한 결과 절반이 넘는(58.8%) 관광객들이 언어 소통이 제대로 안 돼 한국여행이 불편했다고 대답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안내 표지판이나 픽토그램을 활용한 안내지만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게 현실이다.
대구를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들은 대구공항에서부터 이 같은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출국'도착장을 제외하고는 공항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벙어리 신세가 되어 버린다. 택시 승강장 입구에 조그맣게 표시된 택시 그림은 모범택시(Deluxe taxi), 일반택시(Standard taxi)의 구분이 없고 버스승강장에는 한글로 적힌 '버스'라는 안내판만 덩그러니 서 있다. 운좋게 버스를 타더라도 버스에는 영문 노선 안내나 그림 안내가 없어 내릴 곳을 찾기는 대단히 어렵다.
대구를 찾는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투숙하는 인터불고 호텔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 지상과 지하 8층을 자랑하는 대구의 대표적인 숙박시설이지만 각종 시설을 안내하는 표시판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기껏 화장실과 공중전화 안내판이 전부다.
월드컵경기장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매표소 입구에는 다양한 픽토그램으로 편의시설 등을 안내하고 있지만 내국인이 봐도 고개가 절로 갸웃해진다. 경기장 내 시설들을 소개하는 그림이 이해하기 힘들 뿐 아니라 별도의 설명조차 없어 일부 시설물 안내의 경우 경기장 안내원조차 해독이 불가능할 정도다. 직원 관리실 앞에 도착해서야 화장실, 계단, 엘리베이터, 주차장 등이 한눈에 들어오는 픽토그램이 있어 비로소 의문을 풀 수 있다. 또 경기장 내 매점은 한글로 덩그러니 표시돼 있고 경기장 밖 매표소 입구에 마련된 흡연장소를 표시한 그림 역시 사람 얼굴과 혼동할 정도로 비슷해 한참을 봐야 이해가 가능하다.
경기장 내 시설안내는 그나마 양호한 편이다. 그래도 경기장 내 전체 시설을 소개하는 안내도는 한글과 영어를 모르면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기 힘들다. 그 흔한 야외화장실 표시조차 없는데다 지역 사정을 잘 모르는 내국인조차 알기 힘든 표현도 눈에 띈다.
▶생활 속의 픽토그램
2011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앞두고 대구시가 말이 통하지 않아 대구관광에 불편을 겪는 외국인들을 위해 최근 이해하기 쉬운 '대구 픽토그램' 보급에 나서고 있다. 픽토그램이란 대중들에게 특정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그림문자로, 정보를 보다 즉각적'함축적'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진 매체를 말한다. 공항, 역, 터미널 등을 비롯해 교통시설과 대부분의 공공장소에서 사용되고 있다.
특히 대구시는 국가표준으로 제정돼 있지 않은 17종을 새롭게 개발했다. 또 국가표준 중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34종의 픽토그램은 신규 픽토그램의 개발 콘셉트에 맞춰 일부 변형하거나 응용했다. 현재 국가표준으로는 시설안내 표지와 안전 표지 등 총 335종의 픽토그램이 제정돼 있다. 이 중 '관계자 외 출입금지' 를 비롯해 '맹견주의, 인화물질 경고, 비상시 유리창을 깨시오, 의사, 귀마개 착용, 보안경 착용, 비상대피소, 사용 후 전원 차단, 밀지 마시오, 의료용 보안대 착용, 안전복 착용, 머리 위 주의, 손을 씻으시오' 등 14개는 국제표준화기구(ISO)가 채택한 국제표준에 속해 있다.
서자원 대구시 공공디자인 담당은 "픽토그램을 활용하면 간판이나 공공시각 매체에 사용되는 문자수를 줄여 보다 단순하고 명쾌하게 뜻을 전달할 수 있다"며 "대구시가 자체 개발한 픽토그램은 복잡하고 의미가 모호한 기존 픽토그램을 대거 수정해 누구나 알기 쉽도록 제작했다"고 설명했다. 대구시는 픽토그램 보급을 위해 대구 픽토그램 매뉴얼과 개별 픽토그램 파일이 저장된 CD를 케이스에 담아 배부할 계획이다. 원한다면 누구나 구청과 협의를 통해 광고문구 등에도 사용할 수 있다.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사진·안상호 편집위원 shah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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