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남희의 즐거운 책 읽기]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서경식 / 철수와영희

얼마 전 TV를 보면서 한 재일조선인 청년의 눈물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제 갓 스물을 넘긴, 굳이 분단된 조국의 한쪽 축구 대표선수로 나선 그 청년의 굵은 눈물은 재일조선인들의 역사와 그들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그들에게 조국이란 무엇일까?

1970년대 박정희 정권 때 유학생 간첩단이라는 이름으로 재일교포 청년 두 명이 구속되었다. 모진 고문을 참지 못해 형은 화로를 뒤집어써 평생 화상을 입은 얼굴로 살게 되었고, 동생은 비전향장기수로 17년간 감옥에서 복역하다 풀려났다. 조국을 그리워해 조국의 품에 안기려고 한 그들에게 조국은 끔찍한 고문과 긴 옥살이를 안겨준 것이다. 그들에게 조국은 무엇이었을까?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의 저자 서경식은 바로 그들의 동생이다.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형들의 고난에 찬 삶을 지켜보아야 했던 그에게 재일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은 참으로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한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 백성으로 태어나 일본에 건너가서 살아야 했던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과거를 반성하기보다는 스스로를 '피해자'로 인식하고 싶어하는 일본에서 식민지배의 피해자로 살아온 체험, 국가와 국민, 디아스포라에 대해.

그의 형 서준식은 감옥에 있을 때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그것이 좋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랑이 처절하리만큼 진한 사랑일 경우에는 좋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상식적인 논리를 멀리 초월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나는 무엇인가가 좋기 때문에 사랑하겠다는 식의 논리를 넘어서 알고 싶었다.

이를 악물고 진정한 한국인이 되고 싶었고, 나의 골수 깊이 박힌 일본을 알코올로라도 씻어내고 싶어했던 그런 고집스럽고 고통스러웠던 발버둥질의 시간이 흘러간 시점에서, 나는 어느새 일본보다 각박하고 더럽고 야비했던 나의 조국을 미치게 사랑하기 시작하고 있었고, 일본인 친구들처럼 착하고 성실하고 소박하고 한마디로 선량하지 못했던, 아픔과 괴로움 범벅이 되어 살아가는 동포들에게 내가 뜨거운 애정을 느끼고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재일조선인에게 조국은 애증이 뒤섞인 대상이며, 조국을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내면적인 식민 지배를 벗어나려는 눈물겨운 노력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태어나서 자란 고향 일본을 어쩔 수 없이 그리워하며, 그런 감정 사이에서 동요하고 고뇌하고 흔들리고 분열된다. 그들은 고향을 마음껏 그리워하는 실향민들을 차라리 부러워한다.

저자는 고통받고 억압받는 것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관동대지진 때 재일조선인이 6천 명이나 희생당했는데도, 기념비 하나 없을 뿐 아니라 명단도 없고,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진상 규명에 나서거나 사과한 적이 한 번도 없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재일조선인 문제에 대한 저자의 치열한 인식은 일본 식민지배의 유산을 넘어 세계 곳곳의 억압과 학살로 나아간다.

세계 곳곳에서 기억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1960년부터 1996년까지 계속된 과테말라 내전에서는 원주민들이 대량 학살되었다. 게라디 주교는 원주민들과 그들을 기억하기 위해 '역사적 기억 회복 프로젝트'를 진행하였고 암살당했다. 그후 살라사르라는 사진 예술가는 '과테말라:어느 천사의 기억'이라는 설치 미술을 통해 과테말라 내전을 기억하고 세상에 알려나간다.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 대변자도 없는 이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마저 완전히 사라진 존재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저자는 묻는다. 기억의 투쟁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떻게 공헌할 수 있을지, 어떻게 참여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해서든 기억투쟁에서 이겨내야만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새벗도서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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